대구출신으로 6.25 때 북으로 간 유명화가로는 이쾌대(李快大)와 김용준(金瑢俊)이 있다. 해방공간에 활발한 좌익미술운동을 벌였던 이쾌대는 6.25 때 의용군으로 갔다가 포로가 된 후 포로교환 때 북행을 자청한 적극적인 좌경행동파였다. 반면에 김용준은 그 무렵 지식인들의 보편적인 성향대로 좌익 심파(동정파)수준이었으나 6.25이후 붉은 서울에서 좌익의 조직적인 미술활동에 휩쓸린 나머지 9.28 때 막다른 선택으로 북으로 간 화가였다.
천석꾼 집안의 둘째 아들이었던 이쾌대와는 달리, 1904년 생으로, 가난한 농사꾼의 장남이었던 김용준은 대구의 해성학교를 졸업하고서도 진학할 형편이 못 되었다. 미술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2년 뒤 친지의 도움으로 간신히 서울 중앙중학에 진학하면서 화가의 꿈을 펴 갈 수 있게 된다. 1921년 중학을 마치고 도일한 그는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 고학 끝에 1928년 졸업한다. 졸업과 동시에 모교인 중앙중학의 미술교사가 되면서 안정된 화가의 길을 걷는 한편 수필가와 미술사가로서의 또 다른 숨은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김용준은 아호가 많았다. 선부(善夫), 금려(黔驢), 반야초당주(半夜草堂主), 근원(近園), 벽루(碧樓), 우산(牛山), 매정(梅丁)등 일곱 개나 되었다. 이 중 조선조의 대화가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를 사숙하며 닮아보고 싶다는 뜻에서 지은 '근원'을 즐겨 사용했다. 일제의 '조선미술전람회'에 반감을 가졌던 그는 1938년 이후 서양화보다 동양화에 몰두했으며, 해방 후 단원관련 논문을 수차 발표했을 정도로 단원에 매료되어 있었다. 이런 연구결과는 뒷날 북한에서 란 저서로 결실을 본 것으로 알려진다.
해방 후 문화계가 좌우로 갈려 요동칠 때도 김용준은 비교적 초연한 위치에 있었다. 1946년 2월 '조선미술가동맹'이 조직되고, 이어 조직된 '조선조형예술동맹'과 합쳐 '조선미술동맹'으로 개편되었으나 그의 이름은 겉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이 무렵 동국대학의 미술교수였던 그는 고향의 후배화가인 이인성(李仁星)과 이쾌대, 친구인 길진섭(吉鎭燮)이 '동맹'의 고위간부로 활약할 때도 무심한 자세였다. 그만큼 그는 기질적으로 '자유주의자'였다.
수려한 문장과 지적 해학으로 가득 찬 그의 수필집 '근원수필'의 발문에서 그의 사상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예나 이제나 우리 같은 부류의 인간들은 무엇보다 자유스런 심경을 잃고는 살아갈 수 없다. 남에게 해만을 끼치지 않을 테니 나를 자유스럽게 해 달라. 밤낮으로 기원하는 것이 이것이건만 이 조그만 자유조차 나에게 부여되어 있지 않다....."
그런 그가 전란 때 북을 택하고 만 것은 남한현실에 대한 염증과, 적화시기의 '부역행위'가 켕기었기 때문이었지 않았나는 추리를 감안하더라도 파격적인 결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월북 후 그는 조선미술가동맹의 중앙위원과 조선화분과위원장, 조선건축가동맹 중앙위원 등을 겸하면서 미술교수로 있었다. 이 때 '춤', '옥수수', '황금벌', '조국의 앞날을 생각하시며'등의 조선화(동양화)를 창작하며 비교적 안온한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춤'은 그만의 독특한 기법으로 민간무용을 서정적으로 형상화했다는 북한화단의 평가였다. 그러나 김용준으로선 여기까지가 북에서의 전성기이자 생의 끝자락이었다.
1967년의 어느 날 그는 평양의 한 아파트에서 63세를 일기로 자살했다고 한 고위 탈북자가 증언했다. '수령님의 초상화'가 실린 신문지를 오려내지 않은 채 파지에 끼워 넣어 넝마 수매소에 넘겼기 때문이란다. 무심코 한 행위였겠지만 '수령님'을 우상시하는 북으로선 중죄였다. 엄한 추궁과 비판에 못 견뎌 심약한 그는 그만 자살을 택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멋쟁이 신사였고, 자유분방한 지성인이었던 김용준이 애초 강압사회를 택한 것이 잘못인지 모르나 그의 마지막 선택치곤 너무도 어이없고 우화 같은, 강요된 죽음의 선택이었다.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