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밀 바사예프는 체첸 무장세력 지도자들가운데 러시아에 대한 가장 강경한 투쟁을 대표하는 인물로 꼽힌다. 지난해 3월 사망한 아슬란 마스하도프가 비교적 온건한 무장세력 지도자였던 반면 바사예프는 시종일관 체첸 독립을 위해 러시아와 싸우는 방법을 택했다. 특히 바사예프는 러시아 차르 군대가 1859년 체첸을 함락하는 과정에서 끈질기게 저항한 체첸 지도자 이맘 샤밀을 조상으로 두면서 그의 체첸 독립투쟁은 가문의 과업이기도 했다. 그의 이름도 선조인 이맘 샤밀을 본따 샤밀 바사예프로 지을 만큼러시아에 대한 투쟁의식은 남달랐다. 바사예프는 지난 1991년 11월 러시아 정부가 특수부대를 체첸에 파견한데 항의해 러시아 남부 페티고르스크에서 154명이 탄 여객기를 공중납치하면서 체첸 전사로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는 그루지야내 독립을 추구하던 압하지야 반군을 지원하면서 유격대 전법을 익혔고, 이후 체첸으로 돌아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공세를 막아내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1994년부터 2년여동안 진행된 제1차 체첸전쟁에서 게릴라부대를 이끌고 산악지대를 무대로 투쟁의 선봉에 섰다. 1996년 6월 양측이 휴전협정을 맺고 이듬해인 1997년 1월 대러시아 협상론자였던 마스하도프가 체첸 대통령에 오르자 바사예프는 강경 추종세력들을 이끌고 러시아와 유약해진 체첸 정부를 상대로 각종 테러를 자행했다. 그는 1995년 6월 체첸 국경부근 부됴노프스크 병원에서 1천여명을 인질로 잡고 대치하면서 러시아 및 체첸정부군 100여명이 사망했다. 바사예프는 특히 1998년 4월 체첸 의회와 다게스탄 분리주의 세력을 이끌고 인근 다게스탄을 침입, '체첸-다게스탄 공화국' 건설을 선포하면서 러시아내 이슬람국가를 세워 영향력을 확대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후 바사예프가 이끄는 체첸 반군들은 러시아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1999년 여름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러시아 주요 도시의 아파트를 대상으로 5차례의폭탄 테러를 감행, 수백명의 사상자를 냈다. 러시아 정부는 이를 응징하기 위해 제2차 체첸전을 시작했고 1999년 9월 당시 총리였던 푸틴은 체첸 반군들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단행했다. 푸틴이 대통령에 오른뒤 러시아군이 그로즈니를 함락시키면서 체첸전이 끝날 무렵 바사예프는 퇴각 도중에 러시아군의 로켓포에 맞아 한쪽 다리를 잃기도 했다.
이후 그의 사망소식이 수차례 돌았지만 그는 2002년 2월 모스크바 지하철역 폭발사건과 같은해 10월 모스크바 오페라극장 인질사건으로 체첸 전사로서 다시 돌아왔다. 당시 극장 인질사건으로 모두 170명이 사망했다. 특히 그는 2004년 9월 331명의 민간인을 희생시킨 베슬란 인질사건 배후에 자신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바사예프는 지난해 라이벌인 마스하도프가 죽은뒤 조용히 지내왔으며 러시아 정부는 1천만달러의 현상금을 걸고 바사예프를 추적해왔지만 번번이 놓쳤다.
모스크바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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