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와 사람] 연극배우 김재만

공자는 나이 마흔을 '불혹(不惑)'이라 이름 붙여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 말이 연극배우에게까지 맞아떨어지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오히려 이 때쯤이면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가장으로서의 책임이 더욱 무겁게 다가와 계속 무대에 서야하는 지 아니면 미래를 위한 결단을 내려야하는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렇게 선후배들이 무대를 떠나갔어요. 인생의 깊이와 그것을 아느라 바친 경험들을 무대 위에서 펼쳐보이지도 못한 채…."

연극배우 김재만(44)씨. 이제 그도 마흔의 중턱에 섰다. 그의 말처럼 지역 연극 무대에서 마흔을 넘긴 배우를 본다는 게 쉽지 않아졌다.

연극이 좋아 무대에 발을 디뎠다가도 현실로 다가오는 내일에 대한 불안감은 소위 '돈이 되는' 곳으로 발걸음을 향하게 한다. 그렇다보니 연극계는 30대 중반 이후의 배우 수급에 난항을 겪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그래도 그는 연극에 여전히 희망을 건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무대를 떠났던 지난 10년. 그는 영원히 잊겠다 다짐하며 연극 포스터가 내걸린 벽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신문을 펼치더라도 문화면은 아예 펼쳐보지도 않던 시간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무대에 다시 섰다. 배고픈 현실에서도 흔들림 없이 무대를 지켜온 선배, 후배들에 대한 미안함도 한 몫을 했다.

어느 날 후배가 자신이 겪은 똑같은 고민으로 머리를 움켜쥔다면 "그래도 연극은 포기하지마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이제 무대를 지키는 데 힘을 보태야죠. 연극은 단순히 문화의 한 장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절망에서 희망을 보여주는 종교가 되기도 하니깐요."

김 씨는 요즘 무척이나 바쁘다. 올 들어서만도 창작소극장 연극제 무대에 올려진 '나무꾼의 옷을 훔친 선녀'와 지난달 공연된 대구시립무용단의 '꼭두각시'의 대본을 썼다. 단역이긴 했지만 영화 '마이캡틴 김대출'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출연도 했고, 지금도 간혹 상영되는 모 제약회사의 CF도 찍었다.

오페라 무대에 서기도 한 그는 최근에는 극단 온누리의 'TV행복한 세상'에 출연해 공연을 마쳤고, 대구호러연극제 무대에 올릴 대본작업 마무리에도 힘을 쏟고 있다. 10월에 다시 한번 무대에 오를 계획이고 현재는 창작 오페라 '불의 혼'에 조연출을 맡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허송했던 10년의 시간을 만회하기라도 하듯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일을 하고 있다. "도대체 당신의 정체성이 뭡니까?" 그는 "여전히 연극 배우"라고 말한다.

그는 이런 다방면, 다작 활동이 연극배우로서의 자부심을 높여준다고 생각한다. "연극배우라고 연극무대만 고집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연극에 뿌리를 두고 문화는 물론 사회 곳곳으로 진출해야 연극인들의 위상도 높아질 것입니다."

돈 버는데 급급해 자존심을 버렸다는 비아냥도 들리지만 무대를 지켜갈 후배들에게 다양한 길을 열어두는 것이 선배로서의 역할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1982년 대학 연극반 활동으로 연극과 인연을 맺었다. 극단 처용의 창립 회원으로 활동하다 연극배우의 꿈을 잠시 접었다.

2000년 돌아온 무대는 달라져 있었다. 80년대 대극장 위주의 서사극들은 소극장의 생활연극으로 변해있었고, 더 이상 객석을 바라보며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됐다.

딱 한 번만 해보자고 다시 찾은 무대였지만 아무렇게나 할 수 없었다. 후배들에게 묻고 또 물었다. 공연을 마쳤을 때 그래도 조금은 부족했다. '만족하는 딱 한 작품만 해보자'. 그렇게 다시 마술에 걸렸다. 2003년 대구연극제에서 '진땀 흘리기'로 최우수 연기상을 받게 됐지만 그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 무대를 떠날 용기를 내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소극장이 늘고, 배우가 설 수 있는 무대가 많아졌다. 능력 있는 젊은 배우, 극작가, 연출가들도 덩달아 자신의 끼를 발산하고 있다. "연극계가 제2의 르네상스를 맞은 것 같아요. 이럴 때일수록 서로 힘이 되어주고 분위기를 잘 추슬러야 대구연극의 미래는 밝아질 겁니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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