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남산 인쇄골목

활자매체는 금속활자 발명 이후 1천여 년 동안 인류문화에 가장 위대한 공헌을 했다. 정신문화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우리에겐 구텐베르크 이전부터 그 효력을 발휘했다는 점에서 경이롭다. 우리의 인쇄 기술은 신라시대부터 보급됐고,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엔 눈부신 발전을 일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는 물론, 금속활자 발명도 구텐베르크보다 200년 훨씬 넘게 앞서 있었다.

○…1996년 경주 불국사 석가탑 해체 보수 과정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 751년경에 이미 목판인쇄가 이뤄졌음이 밝혀졌다. 또 1234년에 제작된 '고금상정예문'은 이때부터 동활자가 등장했음을 방증하지 않았던가. 이같이 우리 민족은 인쇄문화와 더불어 풍요로운 정신세계를 구가했으며, 근'현대화 과정에서 대구는 그 꽃들을 피워 냈다. 하지만 디지털시대는 이제 많은 걸 바뀌게 하고 있다.

○…크고 작은 700여 인쇄업체들이 밀집해 있는 대구의 명물거리 '남산 인쇄골목'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이 일대가 지난 12일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 기본계획 구역'으로 지정, 재편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관련 업체들은 대체부지 구하기에 나서고 있지만, 그간 직'간접으로 이용하던 1천400여 업체들 역시 연쇄적인 영향을 받게 됐다.

○…남문시장에서 계산오거리까지 1km에 이르는 이 골목은 1930년대 말부터 활판인쇄소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6'25전쟁 땐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업체들이 옮겨와 전국적인 명성을 얻는 발판이 마련됐다. 그 이후 공판인쇄에서 디지털인쇄까지 현대 인쇄 발달사를 축약해놓은 듯한 역사의 장소로 자리매김하기도 했었다. 2000년대로 접어들어서는 인쇄정보산업협의회가 결성, '남산 인쇄골목 축제'도 열려 왔다.

○…활자매체의 사양길은 피하기 어려운 현실이며, 관련 업체들의 쇠퇴도 불가피한 형편이다. 남산 인쇄골목은 활성화 방안을 꾸준히 모색해 왔으나 재개발의 벽에 닿으면서 밀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물색되고 있는 '인쇄전문단지'가 북구 3공단에 들어서든 서구 서대구산업단지에 조성되든 오랜 전통을 이을 수 있어야 한다. 대구 인쇄문화의 옛 명성 되찾기와 새로운 경쟁력 일구기를 기대해 본다.

이태수 논설주간

tspoet@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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