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보따리의 꿈] 보따리상 "이렇게 산다"

지난 6일 오후 5시 부산 국제선 여객터미널 출국장. 일본 시모노세키로 떠나는 부관페리(주) 성희호를 타려는 여행객들이 출국심사를 받고 밀물처럼 밀려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선 수십명의 사람들이 수많은 박스들 틈에서 통관절차를 밟기위해 분주했다.

수많은 박스들과 씨름하고 있는 이들은 국경무역의 첨병이라는 보따리상들이다.

이날 성희호에는 100여명 가량의 보따리상이 타고 있었다. 90%가 50대 이상 여성이었으며 이 중 절반 이상은 60대가 넘은 노인들이었다. 40, 50대 남자들은 10여명. 하지만 이들은 물건의 양으로 따져볼 때 전체의 3분의1을 차지할 정도로 왕성한 활동력을 보였다.

한푼이라도 아껴야 하는 보따리 상들은 대부분 12명이 자는 2등석 일반실을 사용한다. 군대 내무반을 연상시키는 구조로 한 명이 잘 수 있는 공간에 매트리스를 깔고 잠을 청한다. 목욕탕, 화장실은 공용.

밥값이라도 아껴야하는 이들은 서너 끼의 도시락을 싸서 다닌다. 각자 짐을 정리하자마자 일반실, 갑판 등에서 삼삼오오 둘러앉아 몇 가지 안되는 반찬을 펼쳐놓고 식사를 한다. 통로, 갑판에는 각자 자신의 물건을 알 수 있게 간단한 기호를 적어놓은 김, 라면 박스 등이 가지런히 정돈돼 있다.

저녁식사를 한 뒤에는 목욕을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잠자리에 들 무렵은 파도가 심해 배 안은 '어울렁 더울렁'. 하지만 익숙해진 탓일까? 왠만큼 배가 흔들려도 잠자는 데는 아무런 방해가 되지 못했다.

새벽 4~5시면 모두 일어나 자신의 짐을 챙기고 내릴 준비를 시작한다. 윤숙국 부관페리(주) 성희호 선장은 "상용고객들(보따리상)은 이 배와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대가족"이라며 "이젠 일본에 갔다 돌아올 때 얼굴 표정만 봐도 돈을 어느 정도 벌었는지 짐작이 간다."고 말했다.

이들이 취급하는 품목은 대부분 김, 라면, 옥수수 차, 불고기 양념 등 식료품이다. 일본에서 갑절 가량 값을 쳐주기 때문에 박스 당 1만~2만 원 정도의 이윤을 남길 수 있다. 하지만 한번에 1인당 30만 엔(약 250만 원) 이상은 통관할 수 없기 때문에 가져가는 물건의 총액에 특별히 유의해야 한다. 배 삯을 제외하고 이들 보따리 상들의 한달 평균 수입은 150만∼200만 원. 예전에 비해 수입이 절반 이하로 줄어 별로 재미가 없는 편이다. 때문에 보따리상 역시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최근에는 원화의 가치가 높아지면서 일본보다 오히려 한국 물건의 가격이 더 싸져서 코끼리 밥솥, 카메라, 노트북 등 전자제품을 사오는 것도 재미를 보지 못한 지 오래됐다. 단 참깨, 참기름 등 몇몇 식료품의 경우 일본이 상대적으로 가격이 싸 대표적으로 수입되는 품목으로 손꼽힌다.

보따리상 최고령 권순희(80) 할머니는 "참기름 3통, 참깨 5봉지, 담배 2보루, 양주 1병 등 면세품목만 팔고 용돈정도 벌어쓴다."며 "이렇게 다녀야 심심치 않고 나이를 잊고 산다."고 했다.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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