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 서라벌의 꿈

"신라 천년의 고도, 서라벌이 가까워 옵니다." 이 한 마디 차내 방송에 사람들의 가슴이 절로 숙연해지고 옷깃이라도 여미게 되는, 또한 '서라벌'이라는 푯말만 봐도 지나는 차량들이 경적을 죽이고 속도를 줄이게 되는, 그리하여 '서라벌'하면 벌써 사람들의 가슴에 물이 괴고 까닭 모르게 이마가 더워오는. ─ 소박하지만 결코 녹록하지 않은 정신의 숙도를 요하는 이런 일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정황이 내가 바라는 서라벌의 모습이요, 내가 생각하는 서라벌의 꿈이다.

주차장이나 숙박.위락시설들은 아예 건천이나 아화.안강이나 외동쯤에다 터를 잡고, 시가지에는 자동차가 다니는 길을 되도록이면 줄여야 할 것이다. 하다못해 왕경 안쪽은 숫제 걸어서만 다니게 하면 어떨까. 그냥 잘 다져놓은 흙길도 좋으려니와, 아주 예전의 방식을 살려 전돌이나 청석 같은 것을 깐 길이면 더욱 제격이리라.

곳곳에 심은 나무들이 얼싸 어우러져 여름이면 온 시정이 짙푸른 녹음 속에 갈앉는, 그 무량의 정적감. 나무도 같은 값이면 이 땅의 물빛 그리움으로 크는 소나무·감나무·대나무·대추나무·앵두나무·느티나무·으능나무·배롱나무·이팝나무·느릅나무·풍개나무·모감주나무·자귀나무·석류나무·모과나무·산수유나무·생강나무·참죽나무·때죽나무·가죽나무·팽나무·회화나무 따위가 좋을 성싶다.

유실수와 활엽수, 큰키나무와 떨기나무를 고루 갖춰 심는 건 물론이다. 그 짙푸른 방향 속에 엷은 보랏빛 남산이 잇닿아 있고, 연신 일렁거리는 녹음 사이로 분황사며 백률사는 또 낡은 단청을 언뜻언뜻 비쳐 보일 테지.

석굴암을 오르는 길은 그냥 좀 넉넉한 푼수의 오솔길이면 족하다. 꼭두새벽, 어둠과 골안개를 헤치고 올라 비로소 맞는 동해의 해돋이야말로 이 땅이 참으로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감격에 온몸이 휘감기게 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랴.

산길을 오르는 수고로움을 마뜩찮게 여기는 이라면 아예 석굴암 오르기를 포기함이 옳다. 산허리를 사정없이 까뭉갠, 그리하여 일찍이 달을 삼키고 해를 뱉는다는 토함산의 정기를 깡그리 짓밟아 버린 산간도로는 원상대로 회복되어야 마땅하다.

사정은 토함산 기슭에 있는 불국사도 마찬가지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서라벌 절집의 본디 모습을 되살려 그 산의 품에 되돌려 주어야 한다. 개발이란 허명을 앞세워 이루어진 졸속의 경관을 거두어 들이는 일은 이르면 이를수록 좋다.

즈믄 해 묵은 절집의 자존심을 되살리는 길이 달리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 다음, 그 산 골짜기 물길을 휘잡아 애시당초 그러했던 것처럼 범영루 아래 구품영지로 떨어지게 한다면, 그 경개가 과연 어떠할까.

송사리떼 버들붕어가 뜨는 그 물은 청류. 내친 김에 남산 기슭의 속절없는 물길 한 자락을 이끌어 포석정 물돌 위에 술잔이라도 띄운다면, 그 감개는 또한 어떠할까. 시심을 감돌아 흐르는 유상곡수의 저 아득하고 서늘한 풍류가 금세라도 되살아날 것만 같다.

될 수만 있다면 집들은 모두 담장을 헐고, 그 자리에는 철 따라 벙글고 이우는 푸나무 울을 두를 일이다. 집집마다 마당귀엔 한두 개의 석등이라도 앉혀, 밤이면 그 따뜻한 인정 같은 불빛을 모아 서라벌의 옛 영화를 밝힐 일이다.

그윽한 가야금 소리 대숲에 차고, 달빛이 깔린 반월성을 돌아 내리면 거기 이슥한 계림. 저만치 건너다 뵈는 곳에 첨성대가 솟고, 또 그 너머로 임해전 소슬한 누각은 안압지 푸른 물 그늘에 까닭 없이 서러운 이마라도 씻으리라.

천년 세월의 무게를 견디며 한 나라의 도읍으로 온전했던 곳이 어디 그리 흔하던가?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서라벌은 온 벌이 그냥 통째로 문화 유산이자 자랑이다. 처음으로 삼한일통을 이룬 만큼 우리네 정신의 실질적인 뿌리도 많은 부분 여기에서 말미암는다.

그런 정신을 가꾼 터전을 되도록이면 본디 모습으로 돌이켜 남기는 게 민족문화의 원형질을 풍요롭게 하는 일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문화의 본질은 모으고 간추린 것을 길이 지켜 이어가는 데 있다. 그냥 이 땅에 있는 문화가 아니라, 이 땅에 사는 이들이 함께 누려 가지는 문화를 가꾸어 가는 노력이 절실한 이즈음이다.

박기섭(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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