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하여 자신의 존재 의미를 규명하고 확인한다. 만남과 대화의 철학자라 불리는 마르틴 부버는 만남을 두 종류로 나눈다. '나와 너(I-Thou)'의 관계에서는 상대와의 정서적 공감대를 중시한다. 둘은 수평적이고 대등하며 상대는 그 자체가 목적이고 인격적인 존재이다. 여기에서는 상대의 잠재능력을 인정하고 자발적인 의지를 존중한다. '나와 그것(I-It)'의 관계에서 상대는 나의 편리와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수단적, 도구적 존재이다. 둘은 서로 종속적 관계이다.
많은 가정에서 부모 자녀 사이에 소통의 문제가 심각하다. 양자의 관계가 '나와 너'의 관계가 아닌 '나와 그것'의 관계로 전락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부모가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면 자녀는 반드시 좋은 성적과 행동으로 보답해야 한다. 자녀가 좋은 성적을 받거나 부모의 어깨를 으쓱하게 하는 어떤 대단한 일을 하게 되면 부모는 자녀에게 구체적인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 어느 한 쪽이 약속을 어기거나 기대를 저버리게 되면 서로 심한 질책이나 원망을 한다. 정서적인 공감대나 인격적인 존중, 가슴 뭉클한 감동과 감사 따위는 없다. 부모에게 있어서 자식은 남의 집 아이들과 비교의 대상이며, 자신의 욕구를 대리 만족시켜 주는 수단이다. 자녀에게 있어서 부모는 현금자동인출기이다. 성적표라는 카드를 부모라는 자동인출기에 넣고 확인 버튼만 누르면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성적에 비례한 용돈이 나온다. 앞으로 더 좋은 성적을 받을 거라고 사정하면 대출도 가능하다. 둘 사이는 '나와 그것'의 관계로 타산적인 거래만 있다.
방학이다. 평소보다 시간은 많아도 생각기피증과 영상중독증에 빠져 있는 자녀들은 독서나 사색보다는 컴퓨터나 비디오 등을 찾아 일시적 욕망을 채우려 할 것이다. 부모는 학원시간표를 알아보고 잡다한 입시 정보를 뒤지며 아이들을 다그칠 것이다. 한 집에 같이 살아도 진정한 대화나 상호 이해의 따뜻한 만남은 없고 피상적인 스침만 있다면 훗날 기나긴 고통과 후회가 뒤따를 것이다.
부모 형제도 물화된 '그것'으로 전락할 수 있듯이 이름 모를 들풀과 발부리에 차이는 돌멩이도 인격적인 '너'가 될 수 있다. 나를 낳아준 부모님, 내 생명의 연장인 자녀, 위대한 고전 작품, 작렬하는 태양, 여름 해변, 시골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 내가 가슴을 열면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너'가 되고, 너로 인해 나의 존재 의미는 더욱 깊어지고 확장된다. 방학은 단절된 대화를 복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윤일현 (교육평론가, 송원학원진학지도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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