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여기가 초등학교 교실이 맞나? 정신이 하나도 없다. 20명의 아이들 중 의자에 앉은 아이는 하나도 없었다. 교과서도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바닥에 앉거나 엎드린 채 저마다 무언가를 열심히 그리고, 쓰고, 만들고 있다. 재잘재잘 떠들기는 예사. 데굴데굴 구르는 놈도 있다. 이쯤되면 교사의 인내심도 폭발직전이 아닐까 싶은데, "똑바로 앉아!" "조용히 해!" 하는 호통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대신 교실을 돌며 팀별로 맡은 주제를 환기시키고 의견을 조율해 준다. 시끌벅적하던 교실은 어느 새 착착 제 할 일을 찾아갔다.
지난 15일 오전 남대구초등학교 1학년 2반 교실. 기자는 당황스런(?) 10여 분을 보내고 나서야 '세상에서 가장 좋은 초등학교 만들기'라는 이 프로젝트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여름방학 전에 연극 형식의 학예회를 열기로 했다는 아이들은 제 스스로 무대를 그리고, 역할을 정하고, 대본을 쓰고 있었다.
남대구초교에서는 지난 3월부터 대구시 교육청과 대구교대가 공동으로 '창의적 삶을 위한 대안적 학교교육과정 모델의 탐색'이라는 제목 아래 5개월째 교실 혁명을 실험하고 있다. 1~6학년 480명 전교생을 대상으로 한 대구 최초의 '학교 실험'이다.
"전통적인 수업에서는 교사가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해요. 그러나 이 곳에서 교사는 아이들 스스로 지식을 구성하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배우고 싶은 내용도 아이들이 정합니다." 천필수 교장의 말.
하지만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교과서도 없이 무엇을 가르친다는 것일까. 아이들의 흥미만 좇아 가는 수업이 가능키나 한 것일까.
언뜻 자유분방해 보이는 이 실험 수업 뒤에는 오랜 기간의 연구와 검증이 있었다. 대구교대, 시 교육청, 이 학교 교사들은 지난해 12월부터 연수와 보고회를 거듭했다. 앞서 상주의 초교 한 학급을 대상으로 1년간 선행 연구도 거쳤다. 이런 과정을 통해 커리큘럼을 완전히 새로 짰다. 1학년 경우 국어, 수학을 제외한 바른생활, 슬기로운 생활, 즐거운 생활 등 통합교과 세 과목을 해체해 하나의 주제를 가진 프로젝트 수업으로 다시 합쳤다. 연구진들이 머리를 맞대고 세 과목에서 공통으로 뽑은 내용은 '나(我)'. 아이들이 궁금해할 만한 10여 가지의 예상 주제망도 제작했다. '나 프로젝트'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나는 어디에서 왔을까'가 첫 내용이었어요.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 얘기를 발표하다 보니 다음 수업에서는 자연스럽게 '가족 소개'로 넘어갔어요. 그런데 그 중 한 아이가 동생 중에 아기가 있대요. 아이들은 제 몸이 자랐다는 걸 알게 됐고 몸에 대한 궁금증을 쏟아냈어요."
김미영 1학년 담임교사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마인드 맵' 형식으로 아이들을 도와줬을 뿐이라고 말했다.
내 눈은 어떻게 생겼나, 뇌 속은 왜 이렇게 쭈글쭈글할까, 핏줄을 한 번 그려볼까, 뼈는 몇 개나 있을까, 심장 소리를 악기로 표현해 볼까…. 만들고, 그리고, 쓰고, 책을 뒤졌다. 아이들은 우유곽, 셀로판지, 색종이 따위를 이용해 제법 그럴싸하게 눈, 입, 뼈 모형을 만들었다.
교실은 더 이상 줄 지어 앉아 선생님만 주목해야 하는 딱딱한 공간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바닥, 칠판, 벽을 가리지 않고 자기가 만든 것을 걸고, 의견을 적는 데 이용하고 있었다.
이런 수업이 가능한 데는 대구교대·대구가톨릭대 등 교수 6명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교수들은 지난 5개월간 학교에 상주하다시피했다. 직접 수업을 진행하기도 하고 교사들의 지도방법을 즉석에서 바로잡아 주기도 했다.
2학년생들은 1학기 동안 '자람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내가 성장하고 있음을 배우자는 취지였는데 이때 '돌발상황'이 생겼다.
"한 아이가 운동장에 핀 살구나무 꽃을 신기해 하길래 다 같이 나가 관찰했어요. 그런데 화단을 지나다 보니 개나리, 민들레도 자라고 있는 거예요. 아이들은 갑자기 강남콩을 키워보고 싶다고 했어요. 시키지도 않았는데 양파를 키워 사진까지 찍어온 애도 있었어요." 배정희(연구부장) 2학년 교사는 아이들의 관찰력이나 의사표현력이 또래보다 월등한 수준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배운 아이들이 다른 학교 아이들에 비해 성적면에서 떨어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다.
"학부모님들이 가장 걱정하는게 바로 그거예요. 5, 6학년으로 올라가서 또는 중학교에 진학한 이후에 경쟁에서 뒤지면 어쩌나 하는 것이죠."
최석민 대구교대 교수는 공교육의 테두리 내(즉 국정교과서의 범위)에서 진행하는 수업이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학교 측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지난 달 말 자체 시험을 치렀고, 20일에도 다른 학교 문제지를 받아 객관적인 검증을 할 예정이다.
이원희 대구교대 교수는 "전통적인 전달식 수업으로는 요즘 강조되는 '문제해결 능력', '창의력'을 발현하는데 한계가 있다."며 "이런 수업방식에서는 과제 집착력이나 의사 표현력, 협동심 등이 자연스레 몸에 배기 때문에 고학년이 될수록 더 큰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최병고기자 c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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