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던 빗줄기가 다시 장대비로 변해 '끔찍한' 소리를 냈다. 요 며칠간 빗소리는 더 이상 낭만이 아니라 재앙을 부르는 전주곡처럼 들린다. 장대비가 바다에 떨어지면 파도와 합쳐져 훨씬 더 요란한 소리로 겁을 준다. 호미곶 해맞이 공원을 찾은 날 이곳의 상징인 '상생의 손' 다섯 손가락에는 저마다 갈매기가 앉아 장대비를 맞고 있었다. 빗줄기가 굵어 사냥에 나서지 못하고, 땅위의 사람들처럼 비가 긋기만을 기다릴 터이다.
◆희망의 새 출발을 위해 호미곶을 찾는다=전국이 장맛비와 파업대열로 멍들었던 지난 20일, 호미곶의 풍경은 전혀 달랐다. 한창 휴가철이지만 장대비 탓인지 호젓하기까지 했다. 우산을 받쳐들고 바닷가를 산책하던 한 쌍의 연인을 만났다. 올 가을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김영철(29·대전 은행동), 이은미(28·서울 수유동) 커플은 새 출발을 앞두고 서로의 사랑을 다지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고 했다. 이들 외에도 여럿을 만났다. 결혼 20주년 기념여행을 왔다는 중년 부부도 있었고, 다음달 1일 첫 출근을 앞두고 의지를 다지기 위해 호미곶에 왔다는 사회 초년병 김호영(28·창원 대방동) 씨는 "가장 넓은 바다를 볼 수 있는 이곳에서, 세상을 향해 나의 출발을 알리고 싶었다."고 했다.
한반도의 동쪽 끝, 호미곶은 이런 곳이다. 슬픔을 털어내는 곳이고, 새 출발을 알리는 자리이며, 사랑을 다지는 공간이다. 그래서 해돋이 축제가 열리는 새해 첫날뿐 아니라 1년 내내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일출을 볼 수 있으면 좋고 못봐도 괜찮다. 모든 걸 털어내고 새로운 시작을 알리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까꾸리계'를 아시나요?=호미곶으로 가는 길은 한가지뿐이다. 포스코를 지나 구룡포 가는 길에서 왼쪽으로 꺾어 해병대 휴양소인 '청룡회관'을 지나 임곡리를 거치는 코스와 역방향으로 구룡포에서 들어가는 길이다. 둘 다 925번 지방도를 이용하는 것이고 호미곶은 이 양방향의 딱 중간쯤에 놓여 있다.
초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호미곶은 해돋이 축제 등으로 하도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호미곶 등대 바로 앞 바닷가로 통하는 마을 길을 따라 북쪽으로 500m 남짓한 거리에 있는 '까꾸리계(鉤浦溪)'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포항사람들 중에도 아는 사람이 드물다.
호미곶은 반도의 동쪽 끝 툭 튀어 나온 지점이어서 1년 내내 바람잘 날이 없다. 그래서 이곳 대보면 구만리 사람들 사이에선 '된밥 먹고 구만바람 쐬지 마라.'는 말이 있다. 바람에 날려갈 수도 있다는 말이다. 마을 입구에 풍력발전기를 만든 것도 이런 이유다.
까꾸리계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바람이 몰아치면 파도가 일고 이 파도에 바다 속의 청어같은 물고기들이 쓸려 나오면 까꾸리(갈고리의 방언)로 그러담을 정도로 고기가 많았던 데서 비롯된 지명이다.
이곳에는 독수리 바위가 있다. 형상이 당장이라도 날아오를 듯한 모습이 독수리와 같다. 풍파(風波)라는 자연조각가가 거칠긴 하지만 멋들어지게 깎은 셈이다. 해질녘 독수리 부리에 걸리는 낙조는 아무에게나 말해주는 풍광이 아니다.
◆대보항에도 들러 보세요=대보면에 들어서면 먼저 '참 한가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시내버스가 다니지만 배차간격이 1시간을 넘고 주말, 공휴일을 빼면 간간이 드나드는 활어차와 군용트럭 말고는 통행량도 별로 없다. 자연히 회 같은 먹을거리가 싸다. 자연산을 먹으려면 잡어회를 시키면 되고 푸짐하게 먹으려면 우럭, 광어 같은 양식고기를 주문하면 된다. 해맞이 광장과 바로 붙어 있는 대보항에 들어서면 횟집도 많고, 아귀나 물곰 같은 생선을 끓여 내놓는 해장국·매운탕 집들도 많다. 이 일대 식당은 모두 맛집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괜찮다.
한가한 어촌이지만 면사무소, 파출소, 농·수협, 해수목욕탕 등 웬만한 편의시설은 다 있고, 항구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마주보며 방파제 끝에 서 있는 흰색, 붉은색 등대는 연인들의 추억 만들기 장소다. 시간이 나면 승용차 트렁크에 낚싯대 한두 개를 넣고 가자.
◆등대박물관, 해맞이 광장은 너무 알려져 재미없다?=포항시청 인터넷 홈페이지(http://www.ipohang.org)에 들어가면 호미곶 전경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그날 그날의 일출시간도 함께 적어 놓았다. 하지만 영상은 영상일 뿐이다. '땅끝이자 바다의 시작점'인 호미곶은 그 경치만으로도 일상에서 탈출한 사람들의 가슴을 뚫어 놓기에 충분하다. 여기에다 등대박물관이 있고, 지난 2000년 새 세기를 맞이하는 기념으로 만든 상생의 손이 호미곶 광장과 그 앞 바다에서 마주보며 서 있다. 또 지금은 고장나 멈춰섰지만 겉모습부터가 이국적인 대형 풍력발전기도 볼거리로는 제격이다.
물론 이런 것들이 아니라 우리나라 육지의 동쪽 끝이라는 것만으로도 호미곶은 희망의 땅이다.
포항·박정출기자 jcpar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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