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경옥입니다] 나그네

장마 끝자락이 남아있지만 세차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가 불볕 더위의 시작을 알려준다. 바캉스 시즌이다.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로 공항마다 북적인다. 연안 부두의 선착장에도 신명나는 트로트 리듬 속에 섬 여행객들을 태운 배들이 바삐 오간다.

여행! 이 두 글자를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기 시작한다. 상상만으로도 엔도르핀이 퐁퐁 뿜어져 나오는 듯하다. 더구나 박목월 시의 주인공마냥 바람처럼 구름처럼 悠悠(유유)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지랴.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여행엔 중독성이 있는 듯하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지만 한 번 길 떠나본 사람들은 다시 또 떠나고 싶어한다. 익숙한 것들에서 떠남으로 얻게 되는 餘白(여백) 때문이다. 손목시계도, 넥타이도 풀어놓고, 일상의 짐도 내려놓고 마음껏 게으름 부리는 베짱이가 되고 싶어한다.

그런 의미에서 같은 여행자라도 목적지와 계획이 있는 '트래블러(traveler)'보다는 발길 닿는 대로 가는 '베가본드(vagabond)'에 더 마음이 간다. 잠시나마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산다는 것, 근사해 보인다. 臨死(임사) 체험자들의 말이 저 세상에서 보니 이곳 사람들이 지나치게 진지하게 살더라는 것이다. 스스로 어떤 틀에 갇힌 채 너무 빡빡하게, 무겁게 산다는 의미일 터.

단순한 삶이 주는 행복감을 역설하는 책 '단순하게 살아라(Simplify Your Life)'의 저자 베르너 티키 퀴스텐마허와 로타르 J 자이베르트는 '적은 것이 결국 더 많은 것'이라고 강조한다. '늘리려 하지 말고 오히려 줄이라', '잡동사니를 쌓지 말고 창고를 비워라', '긴장하지 말고 풀어라', '가속하지 말고 감속하라'…. 그렇다면 여행이야말로 '적은 것이 좋은 것'을 체득할 기회다. 길 위의 사람에겐 짐이 적을수록 좋으므로.

여행은 또한 우리 속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힘이 있다. 프랑스에서는 비행 청소년들을 교정시설에 보내는 대신 할아버지 자원봉사자와 함께 2천km의 긴 旅程(여정)을 걷게 하는 벌을 준다고도 한다. 여행이 지닌 치료 효과 때문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는 나날에서 가끔씩 나그네가 될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태양 이글거리는 이 여름, 모두가 일상의 쉼표 하나쯤 찍을 수 있기를….

전경옥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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