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론] 돌아온 조선왕조실록

25일부터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얼마 전 일본으로부터 환수 받은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을 전시하고 있다. 이 실록은 일제 강점 초기인 1913년에 일본인 동양사학자 시라토리(白鳥庫吉)가 당시 조선총독 테라우치(寺內正毅)를 움직여 동경대학 도서관으로 옮겼던 것이다. 그런데 옮긴 지 10년만인 1923년에 동경대지진이 일어나면서 그 도서관에 소장된 대부분의 장서와 함께 조선왕조실록도 불타버렸다. 다만 당시 도서관 밖으로 대출되었던 왕조실록의 일부가 소실을 면하게 되었다. 그 중 27책이 1932년에 당시 경성제대로 돌아와 규장각 도서로 편입되었고, 그 뒤에 다시 동경대학 도서관에 반납되었던 47책을 이번에 돌려받게 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종13(1413)년 필사본으로 태조실록을 편찬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뒤 세종 때에는 동활자로 4부를 인쇄하여 서울의 춘추관을 비롯하여 충주·성주·전주사고 등 지방에 분산 보관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세 곳 사고에 보관된 실록이 모두 불타버렸지만, 전주사고의 것만 안의·손홍록 두 사람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내장산에 운반하여 병화를 면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후 조선정부는 1부 밖에 없는 실록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하여 실록 재간행을 서둘렀다. 1603년부터 3년에 걸쳐 전주사고본을 저본으로 다시 4부의 실록을 더 인쇄하여 춘추관과 태백산·묘향산·마니산 및 오대산 사고에 분산 보관하였다. 이 중에서 마니산에 보관된 것은 원래 전주사고에 보관되어 병화를 면한 것을 그대로 보관하게 되었고, 다른 4부는 새로 인쇄한 것이었다.

오대산사고본은 임진왜란 후 전주사고본을 기초로 새로 간행할 때에 인쇄교정을 위해 찍은 교정지를 모아 제책한 말하자면 '교정쇄 실록'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오대산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실록이 모두 교정쇄 실록만은 아니다. 교정쇄 실록에 해당하는 부분은 태조 때부터 명종 때까지의 실록 즉 선조실록 이전의 것에 한정되어 있는데, 이 실록들에는 주서(朱書) 혹은 묵서(墨書)로 교정을 본 흔적이 있어서 다른 네 사고의 실록과는 차이가 있다. 오대산사고본에는 광해군 때에 편찬한 선조실록부터 철종 때까지의 실록도 보관되어 있었는데, 이것들은 다른 사고의 것과 꼭 같은 정본이다. 이번에 환수한 오대산사고본 중에 성종실록과 중종실록은 교정쇄 실록이어서 다른 사고의 것과 차이가 있지만, 선조실록은 다른 사고에 보관되어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오대산사고본 중 교정쇄 실록은 조선 중기까지의 인쇄교정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우리나라 역사기록의 오랜 전통 위에서 이뤄진 것이다. 삼국시대에 이미 역사기록을 가졌던 한국은 고려시대에 실록을 이미 편찬하고 있었다. 그 전통이 조선조에 이르러 역대 왕의 사후에 실록을 편찬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평소에 사관들은 왕의 동정을 비롯하여 왕에게 올라오는 상소, 서장관의 견문, 국가의 예악, 대·소관청의 보고문서 등 국가에서 시행한 업무들을 빠짐없이 기록하여 연월일순으로 정리했다. 이 시정기(時政記)를 중심으로 뒷날 실록 편찬을 위한 사초(史草)를 만들었다. 왕이 승하하면 이런 사초들을 총 동원하여 실록을 간행하였던 것이다.

세종대에 와서 국왕도 실록을 마음대로 볼 수 없도록 제도화되었다. 그런 조선왕조실록을 이제 국민들이 마음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작년 말부터 국사편찬위원회의 인터넷 홈페이지(sillok.history.go.kr)를 통해 원문과 번역문을 함께 열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을 환수 받기 위해 노력한 불교계 인사들을 비롯해 우리 문화재를 아끼고 사랑하는 많은 분들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린다. 이를 계기로 일제 강점기에 그 내력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일본으로 넘어간 많은 문화재들이 원래의 제 자리로 되돌아오는 문화재환수운동이 전개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 운동은 일본 뿐 아니라 외규장각의 국보급 자료들을 가져간 프랑스를 포함하여 세계 각처에 흩어져 있는 우리 문화재를 상대로 해서 체계적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이만열(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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