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향약집성방' 증보판 펴낸 신전휘 대구한약협회장

1479년(조선 성종 10년) 한양. 승지(承旨) 이경동(李瓊仝)이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다. 세종 때 국산 한약재 보급 활성화를 위해 당시 국내서 구할수 있는 약재류 이름·효능을 모두 밝힌 '향약집성방'이 만들어졌으나 약재류 이름만 있을 뿐 약재류 생김새를 그린 그림이 없다는 것. 이 때문에 백성들이 이 책을 이용, 필요한 약재류를 구하지 못한다고 승지는 임금에게 읍소했다.

성종은 이에 어명을 내려 그림을 함께 담은 알기 쉬운 향약집성방을 만들어내라고 했다. 하지만 어명을 받든 신하는 없었다. 그림을 함께 담은 '업그레이드' 향약집성방은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그 후 527년, 바로 대구 약전골목에서 그 어명은 마침내 실현됐다. 향약집성방에 나오는 약재류를 모두 찾아내 그림보다 더 정확한 사진을 찍고, 현대 한의학에서 확인된 각 약재류의 효능과 한약으로의 제조방법, 복용시 주의사항 등까지 꼼꼼하게 기록한 책이 탄생한 것.

527년이 지나 성종의 어명을 따른 주인공은 대구 약령시보존위원회 이사장을 지냈던 신전휘(65·백초당 한약방 대표) 대구 한약협회 회장. 무려 17년의 긴 세월을 거쳐 책(향약집성방의 향약본초.계명대 출판부)을 만들어냈다.

"오늘 날과 마찬가지로 세종 때에도 백성들이 비싼 중국 약재를 수입해 병을 고쳐야 했습니다. 세종 임금은 이를 안타깝게 여겨 '우리나라에서 나는 약초를 어떤 백성들이라도 알 수 있게 책으로 알려주라.'며 향약집성방을 만들었죠. 하지만 그림 없이 글만으로 어찌 백성들이 약재류를 알았겠습니까? 성종 때 승지가 상소, 이를 고치려 했지만 결국 실현이 안됐죠. 17년 전인 1990년, 제가 한번 해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다. 육지는 물론 제주도 10여 차례, 울릉도 4차례 등 섬지역도 마다않고 약재류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 향약집성방에 나오지만 국내에서 발견이 안되는 약재류는 중국까지 찾아다녔다. 중국에 15번 다녀왔다. 백두산에는 5번이나 올랐다.

"17년 동안 제작비가 얼마나 들었냐고요? 헤아려 보지 않아 모르겠는데 아파트 1채 값은 이 책에 들어갔다고 봐야죠."

약재류 식별을 쉽게 하기 위해 1종류의 약재류 마다 봄·여름·가을·겨울 사계(四季)의 사진을 모두 담아냈다. 약초의 경우, 계절이 바뀔때마다 꽃이 지는 등 모습이 변하니 어떤 계절에 찾아나서든 이 책만 들면 모든 약초를 식별 가능하게 하기 위함. 약초 뿌리 사진과 약재로 가공된 모습도 함께 넣어 1종류의 약초마다 모두 6장의 사진이 붙어있다.

"약재류를 찾아다니는 것도 힘들었지만 500여년 세월 동안 언어 변천이 심했기 때문에 향약집성방 원본에 있는 한자어 약재류 이름과 오늘날 저희가 받아들이고 있는 향약집성방 약재류 이름의 일치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온갖 문헌을 찾으며 고증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죠. 경희대 한약학과 박사인 아들(신용욱 )이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천만 다행이었습니다."

그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대단하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오동나무 재질의 나막신 코 부분도 잘라내 약재(가슴이 아프고 뻐근할 때 효험)로 썼고 대나무 패랭이(정신질환에 효험) 등까지 약재의 일종이라는 것.

"향약집성방 원본에는 360종류가 있는데 20종 가량은 최근들어 분화(예를 들어 창포라는 약초는 창포외에 최근엔 백창포도 약초류로 인정)과정을 거친 것을 감안해 모두 380종류의 약재류를 책에 넣었습니다. 아쉬운 점은 '남등근'이라는 한 종류는 끝내 못 찾아냈습니다. 가장 아쉽습니다."

책을 만드는 작업이 그야말로 '투쟁이었다.'고 한 그는 350년 역사의 대구 약전골목이 다시 한번 전국에 알려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곧 영문으로 번역, 세계속에 우리 한약의 우수성을 알리는 작업에도 나서겠다고 했다. 053)252-5505.

최경철기자 koal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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