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중국 민영기업의 천국 저장성] ④ 해상 실크로드 닝보

'四海萬邦 利涉衝頭' (세계 만방의 사람들이 이곳을 통해 황도에 이르게 됐다.)

닝보(寧波) 시내를 가로질러 바다로 통하는 용강(甬江). 그 입구에 솟을대문같이 우뚝 솟아 있는 기념비는 해상 실크로드 중심지로서 닝보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이곳이 고대로부터 외국 사신들과 상인들이 중국으로 들어오는 주요한 '관문'이었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조형물이다. 북송시대 황도(皇都)는 카이펑(開封). 닝보가 가장 가까운 항구였다. 닝보일보 쉬즈밍(徐志明) 기자는 "닝보는 2천 년 전부터 국제적인 항구였다."면서 "닝보는 개혁개방 이후의 경제발전을 바탕으로 해상 실크로드의 역사를 복원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닝보시는 매년 12월 '해상 실크로드 문화주간'을 정해 닝보의 찬란했던 역사를 복원하고 있다.

이처럼 중국 저장성 닝보(寧波)는 고대로부터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이름이 높았다.

7~8세기경부터 닝보는 중국 동남해안에서는 가장 번성한 국제무역항으로서 신라인은 물론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북적대던 국제적인 도시였다. 닝보가 동북아 해상 실크로드의 중심지가 된 것은 9세기 초 닝보를 해상기지로 삼아 활동한 해상왕 장보고선단의 역할도 간과할 수 없다.

◆해상 실크로드의 역사

닝보에는 해상 실크로드의 역사가 곳곳에 남아 있다.

닝보시 중심가인 하이쓰구(海曙區) 전밍루(鎭明路) 57번지. 이곳에는 지난 6월 15일 '고려사관'(高麗使館)이 증축 복원돼 일반에 공개됐다. 고려사관은 닝보가 한반도와 중국을 잇는 해상 실크로드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켜주는 유적이다.

개관식은 닝보시 탕이쥔(唐一軍) 부서기, 청위에충(成岳沖) 닝보시 부시장, 션주륜(沈祖倫) 전 저장성장 등 중국 측 주요인사와 주상하이 한국총영사, 현지투자 한국기업 대표 및 교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축사에 나선 탕이쥔 부서기는 "최근 닝보 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국내외 여행객이 증가하고 있고 많은 한국기업들이 닝보에 투자하고 있다."면서 "고려사관 복원은 명주(明州·닝보의 옛이름)와 고려 사이의 교류사를 통해 양국의 문화유산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려사관은 지난 1981년 처음으로 복원됐지만 올해 다시 증축 재개관했다. 99년에는 '위에후'(月湖)에서 고려자기 파편 등 '고려사관'의 유적 일부가 발굴됐다. 한·중 간 교류가 확대되고 한국 기업들의 대닝보 투자도 늘어나자 닝보시는 2004년 고려사관 재고증 및 증축에 착수, 지난 6월 고려사관을 재개관했다.

닝보는 당초 75㎡에 불과했던 고려사관을 750㎡로 10배나 넓히는 등 적잖게 신경을 썼다. 전시관은 고려청과 명주청 문화교류청 등 3부분으로 구성돼 있으며 고려와 명주 사이의 교류를 나타내는 문헌과 유적 등을 전시하고 있다.

고려사관 유적지 뿐만 아니라 고려 문종의 아들 대각국사 의천(義天)과 천태종의 교조가 된 의통(義通)대사가 닝보의 보운사에서 수도를 하는 등 닝보와 한반도와의 교류는 계속 이어졌다.

조선 성종 때 추쇄경차관이던 최부(崔溥)는 제주도 인근에서 풍랑을 만나 닝보인근 바닷가에 표류했다. 1488년 1월 17일 닝보 인근 해안인 산먼만(三門灣) 즈송춘(治松村)에 도착한 최부 등 일행 43명은 저장성 타이저우(台州)와 닝하이(寧海), 펑화(奉化)를 거쳐 닝보에 도착했다. 이어 츠시(慈溪), 위야오(余姚)를 거쳐 수로를 타고 항저우(杭州) 등을 북상한 최부 일행은 136일만에 귀국할 수 있었다.

장장 8천800여 리를 걸어서 조선땅으로 돌아온 최부는 거쳐온 중국 각 지방의 문화와 정보를 담아 '표해록'을 썼다. 그가 상륙했던 닝하이 해안에는 후손들이 세워둔 사적비가 있다.

◆닝보-한반도 문화교류

한반도와 닝보 간 문화교류사는 심청전으로도 확인된다.

닝보 앞바다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조우산(舟山)열도 푸타구(普陀區)에는 '션쟈먼'(沈家門)이라는 작은 어항(漁港)이 있다. 푸타구는 불교성지인 푸타산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션쟈먼은 '심가춘'(沈家村)의 중국식 표기다. 이곳에 1만2천 평 규모의 심청원이 조성될 예정이다. 이곳은 심청전과 똑같은 내용의 중국판 심청전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7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닝보항은 고대부터 중국대륙에서 세계로 나아가는 항구였다. 당대(唐代) 이후에는 중국 동남연해 4대 항구로 발전하면서 9세기 초에는 해상왕 장보고선단의 교역중심지가 됐다. 국제 해상무역에 직접 나서지 않았던 당나라는 장보고 선단을 이용, 닝보항을 국제중개무역항으로 만들어 신라와 아라비아 상인들이 교역하도록 했다.

북송(北宋)과 남송(南宋) 시기는 닝보를 중심으로 한 해상 실크로드의 전성기였다. 당시 오랑캐의 침범으로 인한 북방전쟁은 육로를 통한 한반도와의 교류를 불가능하게 했다. 그래서 명주는 고려와의 무역을 위한 유일한 합법항구였다.

1074년 고려가 먼저 송에 중국에 드나들 수 있는 '출입구안'(出入口岸)으로 명주를 개방해줄 것을 요청했고 양국 간 교역은 이때부터 본격화됐다. 양국 간의 무역규모가 확대되자 북송 정화 7년인 1117년 명주 태수 로우이(樓異)가 북송 휘종(徽宗) 황제에게 고려 사신과 무역사절업무를 관장할 수 있는 고려사 설치를 건의했고 이에 휘종이 국가급 영빈관을 갖춘 '고려사행관' 건립을 허가했다. 고려사와 고려사관이 설치됨으로써 명주는 북송의 대고려교역의 주요 창구가 된 것이다.

고려사관에서는 고려 사절들의 통행증을 발급하고 전송, 마중 등의 업무를 처리했을 뿐 아니라 수행사절들에게 일부 무역을 허락함으로써 무역업무도 합법화했다. 무역이 번성하면서 명주의 항운·조선업도 크게 발달하는 등 해상 실크로드의 중심교역항으로서 닝보는 더욱 발전했다.

그러나 고려사관 설립 이전 닝보에는 '신라방'이라는 신라 상인들의 집단 거주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닝보 외곽의 '웨이위엔청'(威遠城)은 신라 사신이나 신라 선단상인들이 묵던 곳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당나라때 신라관이 있던 곳에 고려사관을 증축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고려사관 인근터에는 아라비아상인들이 묵던 '보스관'(波斯館)이 있었다.

고려 사절만 명주에 온 것이 아니라 명주 상인들도 고려 벽란도에 가서 무역활동을 했다. 고려사 등에는 명주상인 천량(陣亮) 등 147명의 송나라 상인들이 벽란도에 와서 교역을 했다(1038년) 는 등의 기록이 있다.

서명수기자 diderot@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