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순(40·여·경북 성주군 초전면) 씨는 하늘이 원망스럽다. 지난 장마 때 하늘에 구멍이 난 듯 비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바람에 살림 밑천인 참외 하우스가 엉망이 돼버렸기 때문. 남편 이기덕(46) 씨의 병원비도 참외를 팔아 마련해야 하는데 돈줄이 완전히 막혀버렸으니...
이 씨의 고향은 참외로 유명한 성주군. 이 씨 역시 평생 참외농사만 지으며 살았다. 하루 종일 일하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논두렁에 앉아 마시는 막걸리 한두 사발을 마시거나 집으로 돌아가 세 딸(중2년, 초교 6년, 초교 1년)이 크는 모습을 보면서 고단함을 잊곤 했다.
젊은 시절 B형 간염으로 지역 보건소에서 약을 타다 먹긴 했지만 특별히 아픈 곳이 없었던 이 씨. 부부가 부지런히 일했던 덕분에 형편은 나쁘지 않았다. 논 1천 평에 정성들여 일군 참외가 누렇게 익어갈 때면 부부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폈다.
"남편이나 저나 일하는 만큼 땅은 반드시 되돌려준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열심히 몸을 움직여서인지 남에게 신세 안 지고 살 정도는 됐습니다. 아이들도 착하게 잘 자라줬고요. 하지만 남편이 쓰러진 뒤부턴 모든 것이 엉망이 돼버렸어요."
7년 전 이 씨는 간경화 판정을 받았다. 힘겨운 농사일을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아이들 챙기는 일과 농사일, 남편 간병까지 모두 전 씨 혼자 감당해야 할 몫이 됐다. 생활은 쪼들려갔고 조금씩 얻어 쓰기 시작한 빚은 계속 불어 어느새 전 재산인 논도 은행에 넘어가버렸다. 지난해 말엔 결국 간경화가 간암으로 전이되기에 이르렀다.
이 씨가 쓰러지기 전 부부의 유일한 걱정거리는 정신지체 2급 장애를 앓고 있는 둘째 딸 유정(11)이었다. 5살 무렵부터 말투가 어눌해지더니 지능발달도 더뎠다. 꾸준히 병원치료를 받았지만 상태는 좋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씨가 투병생활에 들어가면서 유정이에 대한 관심도 후순위로 밀렸다.
전 씨는 도무지 숨 돌릴 틈이 없다. 낮에는 간병인이 남편을 챙기지만 밤이면 전 씨가 남편을 돌봐야 한다. 밤새 남편 곁을 지키며 선잠을 자다 새벽녘이 되면 집이 있는 성주군으로 돌아간다. 아이들을 챙겨 학교에 보낸 뒤 농기구를 챙겨 논으로 나선다. 오후 늦게 다시 대구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다. 이미 몇 달째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계속하고 있는 일상이다.
"몸 여기저기 안 쑤시는 곳이 없네요. 그나마 방학이라 둘째를 등하교 시켜주는 짐은 덜었어요. 맏이 유지(13)가 동생을 잘 챙겨줍니다. 어릴 땐 장애인인 동생을 부끄러워하더니 이젠 너무 잘 해줘요. 제가 신경써주지도 못하는데 알아서 잘 해주고 공부도 열심히 하니 얼마나 고맙고 미안한지 몰라요."
내성적인데다 워낙 말이 없었던 이 씨. 아픈데도 혼자 속으로 삭이며 일하다 병을 키웠다는 것이 전 씨의 생각이다. 전 씨는 부부인데도 자신에게도 병을 숨긴 남편이 야속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하지만 고통스런 항암치료를 받는 남편의 손을 꼭 잡아주는 것 외에 전 씨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지난해 6월 의료보호 혜택을 받으면서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곤 하지만 생활이 궁색해진지는 이미 오래다. 밀린 병원비만 200만 원을 훌쩍 넘었다. 장마와 태풍으로 엉망이 된 참외농사 대신 그 자리에 열무를 갈아 생활비라도 마련하겠다며 뒤돌아서는 전 씨의 어깨가 무거워 보인다.
"요즘 남편은 저만 보면 '미안하다.', '막내가 눈에 자꾸 밟힌다.'고 합니다. 열심히 살았는데 일이 뜻대로 안된다고 한숨을 쉬고요.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순 없습니다. 아이들은 제대로 키워야 하잖아요. 남편만 일어나면 더 바랄 것이 없는데…."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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