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영진의 대구이야기] (32)'반민자' 체포소동극

1949년 대한민국 국민의 화제는 온통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에 관한 것이었다. 48년 12월말에 힘겹게 법제정의 절차를 모두 마친 뒤 새해 벽두부터 친일거물들을 한 둘씩 체포하자, 오늘은 또 누굴 잡아가나 하는 것이 시중의 최대 화제였다. 대구의 신문들도 친일 인물들이 오랏줄에 묶여가는 모습을 연일 보도하기에 바빴다.

전국적인 거물들은 임시정부 문화부장을 역임한 고령출신 제헌의원이자 반민특위위원장인 김상덕(金尙德. 납북)이 직접 파견한 '특경대'에 의해 체포되기 시작했다. 대구경북의 경우, 중추원 참의와 '임전보국단' 부단장을 지낸 고원훈(高元勳)이 1월27일 그의 고향인 문경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2월1일에는 역시 중추원 참의를 지내고, 비행기 헌납으로 유명한 문명기(文明琦)가 고향인 영덕에서 체포되어 갔다.

같은 참의 경력을 지닌 대구의 갑부 서병조는 3월21일 명륜동의 서울 집에서 붙잡혀 갔으며, 참의부의장을 지낸 친일거두 박중양(朴重陽)도 같은 날 대구에서 잡혀 '해방자'호 편으로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에 앞서 3월2일에는 경북도 평의원을 거쳐 참의를 잠시 지낸 서병주가 자수했다고 신문들은 보도했다.

대구의 독립지사 정운일(鄭雲馹)과 방한상(方漢相)이 위원장과 조사관직을 맡았던 '경북반민특위'가 본격적인 조사활동을 벌이던 3월 중에는 어용신문인 매일신보의 주주이자 대구지국장이던 한익동과, '임전보국'경북이사였던 부호 정해붕, 경북도 평의원과 대구부 의원을 지낸 허지, 역시 부의원을 지내고 '임전보국' 경북이사였던 직물업부자 김성재, 그리고 도 평의원 김재환도 잡혀갔다. 대구의 정동(町洞)연합회장을 지낸 배국인은 이 무렵 자수했다.

그러나 더 큰 화제는 동족을 잡아가 죽음의 고문을 자행하던 악질경찰관들에 관한 것이었다. 악명 높던 최석현(崔錫鉉)은 신속체포를 기대했던 것과는 반대로 고향인 경북 봉화군 소천면의 산속에 숨었다는 설과, 일본으로 밀항했다는 설만 남긴 채 끝내 잡히지 않았다. 반면에 큰 사건 때마다 악명을 날렸던 고등계형사 문구호(文龜鎬)와 김성범(金成範)은 3월29일 맨 먼저 '경북특위'에 체포되었다. 또 같은 죄질의 고등계형사였던 송세진(宋世秦)과 배만수(裴萬壽)도 3월 중순 잡혔으며, 오니게이부(鬼警部)로 소문난 경주의 서영출(徐永出)과 대구의 남학봉(南學鳳)은 유명세를 치르느라 2월1일 서울의 특경대에 체포되었다.

현직에 있던 고위친일관리들 중 행정관리들은 어물쩍 넘어갔다. 그러나 친일경찰관에 대해선 들끓는 국민감정이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다. 일제 때 경부계급이었던 현직 대구경찰서장 유철(劉徹)총경이 특경대에 의해 대한민국 고위경찰의 제복을 입은 그대로의 모습으로 수갑에 채워져, 연행되는 모습을 보인 것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경찰의 체질개혁을 위해 해방 후 '혁신경찰'로 특채되었던 어느 인사는 이 광경을 목격하고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전후 사정을 다 이해하면서도, 정복을 입은 현직 경찰의 기관장을 당사자가 근무하던 경찰서 앞에서 대낮에 수갑을 채워가는 모습만은 차마 보기 딱 하더라"

'반민자'체포는 다소 선정적인 '언론재판'에 영향을 받은바 없지 않았으나, 국민감정은 그런대로 속 시원한 결과를 기대했다. 그러나 용두사미였다. 이승만대통령의 노골적인 어깃장에 편승한 친일관리들의 역공을 받아 안하느니 못할 만큼 되었기 때문이다. 신문지상을 통해 잠시 수치감을 준 것 외에는 오히려 면죄부만 안겨준 꼴이었다. 무엇보다 동족을 욕보이는데 앞장섰던 악질 친일관리들만은 징벌했어야 옳았다. 신생 대한민국의 잘 못 채워진 첫 단추치곤 두고두고 회한의 씨가 된, 한때의 어설픈 소동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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