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단일기 60,70] ⑪낭만일기

목인(牧人) 전상렬(全尙烈·1923~2000) 시인의 평생 벗은 시(詩)와 술이었다. 그는 400편이 넘는 시를 남긴 대구문단의 역량있는 시인이었으며, 술에 얽힌 숱한 낭만적인 일화를 남긴 애주가였다.

술에 취한채 신천교에서 떨어지고 영선못에 빠지기도 했으나, 목인의 호주행보(好酒行步)에는 변함이 없었다. '명을 타고 나기는 잘 타고 났는데/ 술복 하나는 잘 타고 났는데/ 옛날에 젖어 우는 건 소인(小人) 아닌가// 오늘도 자욱히 비가 내리고/ 목로집에서 술이나 마시자'.

자신의 시 '매화기'(梅雨期) 구절 그대로였다. 두주불사(斗酒不辭)였던 그는 장날 국밥집 기역자판도 즐겼고, 삼거리 주막 과수댁도 좋았다. 포장마차 선술집도 마다 않았고, 비내리는 목로집 고객이기도 했다.

목인은 시에서 꽃을 피워 술에다 향기를 띄우는 풍아한 멋을 아는 시인이었다. 밤 깊은 줄 모르는 넉넉한 술 인심과 문학적인 기개에 그의 주변에는 늘 문우들이 모여들었다. 목인의 술자리에는 시의 멋이 있고 삶의 맛이 있었다.

봉덕동 옛 효성여대 뒷동네에 살던 한 시절 목인을 중심으로 한 문인들을 봉덕동파로 부르기도 했다. 천하의 취중 독설가 정석모 시인도 한 살 아래인 목인의 인품은 인정하고 들었다. 정석모가 "니 시(詩)가 시(詩)가?"라고 막말을 해도 "허허허" 웃을 따름이니 결국은 "점마 참 게안테이"라는 찬사를 남길수 밖에 없었다.

같은 문인교사이자 '시림' 동인인 이민영 시인은 목인의 성품을 두고 "한 편으로는 강(强)하고 한 편으로는 유(柔)하다. 어떤 측면에서는 격(激)하고 어떤 측면에서는 약(弱)하다. 신사요 귀족이면서 소박하고 담백하다"고 회고했다.

목인은 손바닥만한 금전출납부에 외상값과 빌린 돈 이자까지 꼼꼼히 적어뒀다가 월급날이면 어김없이 값는 섬세한 인물이면서, 호방하고 유머스런 호주가이기도 했다. 봉덕동 시절 어느 늦은밤, 목인의 취중 귀가길을 가로막는 키 큰 사내가 있었다. 향교 앞 어디쯤이었다. 그는 당장 비켜서라고 호통을 쳤고, 말귀를 알아 듣지 못하자 손바닥으로 한 대 휘갈기고 말았다.

그 사내는 전봇대였고, 목인의 무명지에만 평생 상흔이 남았다. 그렇게 술을 좋아하다 보니 월급날이면 이집 저집 외상값을 갚고 반쪽난 봉투를 들고 돌아오기가 일쑤였다. 그러니 대구·경북의 일류 중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했고 교장까지 지냈으면서도 집 한 채 남기지 못했다.

목인은 다재다능해서 문학 뿐만 아니라 서화(書畵)에도 능했다. 동양화 공모전에 세차례나 입상했으며 시화전을 열기도 했다. 자신의 시를 자필로 쓰고 그림까지 곁들이는 멋진 솜씨는 말그대로 시인묵객에 다름 아니었다.

목우(木雨) 도광의(都光義.66) 시인은 목인의 제자이다. 경상중학교 시절 일찍이 목인의 문학적 품격에 흠뻑 빠졌고, 그것이 곧 시의 길을 걷게 된 첫 동기가 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술하고 시(詩) 밖에 안했다." 문학과 함께 한 자신의 삶을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문인이 몇이나 될까.

목인의 제자다운 자긍심이다. 그랬다. 도광의 시인은 대구문단의 마지막 낭만파로 불린다. 그는 일흔이 가까운 지금도 맥주를 밤새워 마시며 술잔 위에 시구절을 주절주절 담아낸다. 미당 서정주의 '동천'과 한성기 시인의 '역', 권기호 시인의 '서쪽의 풍경'을 구절구절 읊조리며 술자리의 품격을 돋군다.

박목월·박용래·전상렬·박훈산의 시를 막힘없이 읊으며, 정비석의 '산정무한'을 책 읽듯이 줄줄 외운다. 옥이집·가보세·혹톨·새집 등 60,70년대를 풍미했던 문인들의 단골 술집이라면 쌀을 맡기고 술을 마시던 도 시인과 얽힌 추억이 한두자락쯤은 남아있다.

같은 매일신문 신춘문예 출신인 작가 이수남은 지난해 초 '향토문학연구' 제7호에 발표한 도광의를 주인공으로 한 실명소설 '후박나무에 떨어지는 빗소리'에서 시인을 이렇게 묘사했다.

'대한민국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만큼 술에 살고 시에 죽는, 의리있는 인물'이라고. 그렇다. 대구 문단에 술꾼치고 도 시인과 술 한잔 나눠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취기가 무르익으면 이따금씩 흘러나오는 애조띤 노래가락은 빼놓을 수 없는 안주감이다.

그야말로 노래같은 시이고 시같은 노래이다. "시는 존재의 한 순간을 잊지 않는 절박한 심정의 표현이자 견딜 수 없는 그리움의 표현"이라는 그의 시론(詩論)처럼, 노래 또한 그런 정감을 머금고 있다.

격식을 갖춰 완창하는 시와 노래는 아니지만, 무르익은 술 한 쪽박을 문득 떠낸 듯 그윽한 감칠맛이 배어있다. 1966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도 시인이 경남 마산고에서 창신고 교사로 옮겼을 무렵 밤새워 술을 마시고 눈내린 아침 하얀 포구를 바라보며 단숨에 써내려 간 시가 있다.

'경남 함안여고/ 백양(白楊)나무 교정에는/ 뼈모양의/ 하얀 갑골(甲骨)길이 보인다/ 함안 조씨, 순흥 안씨, 재령 이씨/ 다투어 살고 있는/ 갑골리에는/ 바람 많은 백양나무 생애로/ 노총각 한 선생이 살아 왔다/ .../어쩌다가 높은 둑길 위로/ 청람빛 가을이 펼쳐지면/ 청동색 강이 오히려 외롭다/ .../우마차 바퀴에/ 옛날이 실려가면/ 함안여고/ 백양나무 교정에서/ 사십대노총각 한 선생은/ 유년의 여선생을 생각이라도 하는 걸까/ ...'

'갑골길'이란 시다. 이 시가 매일신문에 발표되었을 때 박주일 시인은 도광의에게 뽀뽀 세례까지 퍼부었다. 조병화 시인은 한국문학상 후보작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작가 김동리도 "다소 인생파(人生派)적이면서도 고적감이 배어있다"고 한마디 거들었다. 김동리는 도광의에게 '목우'(木雨)라는 호를 준 인물이다.

'후박나무에 떨어지는 빗소리'란 뜻이다. 그러고 보면 그의 삶과 문학이 곧 후박(厚朴)한 나뭇잎에 듣는 빗소리였는지도 모른다. 등단 이후만 치더라도, 술과 함께 한 그의 문학인생은 올해로 꼭 '명정(酩酊) 40년'이다.

교직을 마무리 했던 효성여고 시절 함께 근무했던 문인 서정호는 도광의의 안팎을 이렇게 그렸다. "지도 꾸부정하게 키 크고, 나도 그렇고, 술 좋아하고 친구 좋아하는 것도 같고, 월급으로 아낌없이 친구 접대하기 좋아하는 도광의가 어찌 그리 호감이 가는지..."

도광의는 '술만 잘 먹는 도광의'가 아니라 '사람 좋아하고 제자도 잘 만드는 도광의'였다. 시집 '갑골길'과 '그리운 남풍'을 남긴 그는 대구문인협회 회장을 두 번씩 역임했고 교직에 있으면서 안도현 시인 등 40여명의 유명시인을 제자로 배출했다. '문단의 마당발'로 통하는 도광의.

대구 시단의 마지막 로멘티스트라 할만한 그의 문학과 삶의 이야기들은 곧 대구문단사의 한 단편이기도 하다. 도광의는 오늘도 술잔을 들고 새삼 솔제니친의 말을 전한다. '문학은 정권보다 강하다'. 조향래기자 bulsaj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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