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에서 거리를 내려다보다가 구보 씨는 뙤약볕에 축 처진 나무의 그림자를 옆집 벽에서 발견한다. 정말이지 너무 덥다. 정말 덥다. 동그랗게 산으로 둘러싸인 구보 씨의 도시는 예전부터 먼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폭서·폭한의 도시다.
십여 년 전부터 나무를 많이 심어 도시의 전체 기온이 많이 수그러들었다지만 오랜 장마 뒤끝에 느끼는 체감온도는 정말이지 장난이 아니다. 불줄기 같은 땡볕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자신이 마치 바닷가 방파제 옆에 내동댕이쳐진 한 마리의 불가사리 같다고 느낄 즈음 구보 씨는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소설을 쓰는 친구다. 수년 전부터 승합차에 노트북을 싣고 다니며 마치 보헤미안처럼 떠돌며 글을 쓰는, 자신의 말대로라면 '주거 이전의 자유를 만끽하며 사는' 참으로 재미있는 친구다.
몇 년 동안 벌어둔 돈에 앞으로 글을 써서 받을 원고료를 미리 계산해 할부를 잔뜩 지고 캠핑카를 한 대 샀단다. 곧 데리러 갈 테니 기다리라며 전화를 뚝 끊는다. 구보 씨는 마음이 흔들린다.
올해는 특히 온 나라에 수해(水害)가 극심해 피서는 일찌감치 포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피서마저 가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그 지역의 서민경제를 죽인다는 통계도 있지 않는가.
구보 씨는 배낭에 이 것 저 것 주섬주섬 집어넣으며 중얼거린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광고 카피도 있지 않나, 나는 열체질이고, 정말 재충전이 필요해. 그러다가 책장 모퉁이에 놓인 작은 돼지 저금통을 배낭에 집어넣는다. 이걸 가는 길에 수해의연금으로 기탁하고 가면 되겠군.
직장에서 휴가를 받은 다른 친구와 함께 구보 씨 집 앞에 도착한 소설가는 완벽한 자크 아탈리의 '디지털 노마드'가 되어 있었다. 점점 공간적 경계가 모호해질 21세기가 진정코 원하는 유목민, 충전만 하고 나면 숙식이 완전히 해결되는 캠핑카에 인터넷과 모바일! 산이나 바닷가 또는 계곡, 어디에서나 '글발'이 오르면 차를 세워두고 들어앉아 작업을 한다며 소설가는 신이 나서 설명을 한다.
동그랗고 귀엽게 생긴 차를 한 바퀴 빙 둘러본 구보 씨는 2006년판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보는 것 같단 생각을 하며 차에 훌쩍 뛰어올라 탄다. 동시에 그 영화 속의 '디스커버리'란 우주선 이름이 왠지 이 차엔 꼭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분명히 이 여행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할 테니 말이다.
구보 씨는 아직도 축 처져 있는 옆집 벽의 나무를 뒤로 하고 동네를 벗어난다. 먼 나라의 남쪽 산들과 동쪽 바다를 둘러보자고 친구들이 말한다. 구보 씨도 두 말 없이 즐겁게 동의한다. 자, 여행이다! 도시여 잠시 안녕. 우리는 떠난다네. 너무나도 뜨거운 뙤약볕도 잠시 안녕.
박미영(시인·대구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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