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정재숙 作 '비 개다'

비 개다

정재숙

그냥 젖어 있지.

지렁이들 또 길 위로 간다.

흙 속에서도 온전히 흙이 되지 못해

밟히고 짓이기고.

지렁이들 끝내 흙이 되는 동안

여름볕은 활활 타오르고

거룩한 의식

소신공양.

비가 갠 여름날, 햇볕 아래 온몸을 드러내는 지렁이를 본다. 지렁이가 살기 위해서는 '그냥 젖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왜, 몸을 드러내는가. 오로지 '길 위로' 가기 위해서다. 즉 삶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다. '흙 속에서도 온전히 흙이 되지 못'할 때, '밟히고 짓이'겨져 '끝내 흙이 되'는 길을 기꺼이 가는 것이다. '흙'이 되기 위해, '흙'이 되는 길을 가기 위해 스스로 몸을 드러내 '밟히고 짓이'겨지는 삶, 바로 '소신공양(燒身供養)'하는 구도자(求道者)의 거룩한 삶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물질적 욕망과 개인의 안위를 위해 '길'이 아님을 알면서도 어둠으로 정신과 몸이 다 젖은 채 잠행하고 있지 않은가.

구석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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