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론] 광복 61주년, 국가역량 나이는

광복의 달이다. 올 해가 61주년이니, 이른바 '해방동이'들과 더불어 進甲(진갑)을 맞은 셈이다. 그해 8월 한여름의 뜨거움에 더하여 온 국민이 감격하고 열광했을 열기가 전해오는 듯하다. 그러나 해마다 광복의 달이 되면 착잡한 마음을 떨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도대체 국가의 역량을 어떻게 관리했기에 나라를 잃고 갖은 설움과 고초를 겪다가 겨우 남의 힘을 빌려서야 해방을 맞게 되었을까!

그러고 보니, 해방되던 해로부터 꼭 61년 전인 1884년에 '갑오개혁'이 시도되었다. 일본에서 메이지(明治) 개혁이 있은 지 16년 후의 일이요, 한일합방이 있기 26년 전의 일이다. 만일 그 무렵에 전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일련의 개혁운동들이 성공적으로 추진되었더라면, 그래서 19세기말 20세기 초에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될 수 있었더라면, 그 후에 전개된 한민족의 운명은 크게 달랐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解放(해방)이후 지난 61년 동안에 우리 민족이 실로 대단한 발전을 이루어낸 점이다. 물론 이 기간에도 한국인들의 삶이 결코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정치적인 사안만 보더라도 해방이후 남북분단과 3년간의 '미군정', 3년간의 '6.25 전쟁'과 그 후 지금까지 이어진 냉전시대의 남북 대치, 부패 정권과 '4.19 유혈 학생의거', 세 차례의 군사정변 등 식민통치에서 갓 벗어난 신생 후진국들에게서 나타나는 대부분의 병리현상들을 고루 겪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이와 같은 어려움을 견뎌내면서도 다른 어떤 발전도상국에 비해 뒤지지 않는 빠른 발전을 이루어냈다. 40년대 말 혼미한 국내외 정세 속에서 반쪽이나마 자주독립 국가의 건설을 시작으로, 50년대의 전후복구와 60-80년대의 산업화를 이끌어 냈으며, 8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중앙정치 수준의 민주화를, 그리고 90년대에는 지방수준의 민주화를 차례로 엮어낼 수 있었다.

21세기 초 지금 한국은 세계 10위에 가까운 경제대국이자 군사대국이요 정보화 선진국이 되었다. 그럼에도 일인당 구매력은 25위 수준에 머물러 있고, 세계 5대 국방비지출 국가들인 이웃나라 일본과 중국의 영토 욕심과 주도권 경쟁은 여전하며, 남북한간의 긴장 해결은 아직도 멀어 보인다.

따라서 지속적인 경제력의 성장은 여전히 중요하다. 다만, 과거처럼 성장일변도의 정책을 추진하기란 규범적으로 바람직하지 않거니와 현실 정치적으로도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아니 과거에 성장일변도의 '압축 성장' 정책을 추진했기에 지금 나타나고 있는 후유증들을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공정한(equitable) 분배와 국민의 '삶의 질' 향상 그리고 사회안전망 구축에 힘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다.

이와 같은 '후기 산업화적 과제들'을 무난히 해결하려면 무엇보다도 국민적 합의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정치사회적 상황이 그리 간단해 보이지는 않는다. 압축 성장으로 인한 후기 산업화 후유증을 앓고 있듯이, '압축 민주화'로 인한 일종의 '후기 민주화' 후유증이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한 이후조차도 40년간이나 억제되었던 국민들의 참여욕구가 1987년의 민주주의 이행이후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면서 다양한 가치와 이익의 표명과 결집 그리고 그로 인해 엄청난 규모의 공공서비스 수요의 창출이 형성되고 있지만, 그것을 감당할 만한 수준의 합리적인 참여 및 의사결정의 기제는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은 채로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이와 같은 후기 산업화 및 후기 민주화 후유증을 현명하게 극복하고 국가역량을 증대시키지 못하는 한 선진국으로의 문턱을 넘어서기란 힘들다는 점이다. 해방되던 해로부터 61년 전에 시도되었던 한국 최초의 근대화개혁으로서의 갑오개혁의 실패와 그 후 전개된 한민족의 운명을 해방 61주년에 새삼 되돌아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용덕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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