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살배기 '코끼리 童子(동자)'가 '휴가'를 왔다. 곡절 끝에 어느 스님에 의해 거두어진 아이. 처음 발견됐을 때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고 했다. 의사들은 몸 내부 또한 외모와 다르지 않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깊은 정성이 감싸안고 사랑이 보태져 깁고 약을 쓰고 다듬은 결과 이제 제법 튼튼하고 어른스러워지기까지 했다. 이번 외출을 '휴가'라고 익살 떤 것도 그 자신이었다. 돌봐 주는 보모가 휴가를 가 며칠 맡겨진 것인데도 마치 자신이 휴가의 주인공인 양 능청을 떨었다는 얘기였다.
늘 친가 할머니처럼 걱정해 주는 '할매'를 따라 동자가 필자 일행이 모여 놀던 식당으로 '마실'을 왔다. 깊진 않으나 전부터 있어 온 인연으로 우리 역시 늘 보고 싶던 차. 일행 중 환갑 나이의 한 '할배'가 손을 잡고 아이를 인접 마트로 이끌었다. 하도 대견해 뭐라도 사 주고 싶어서. 하지만 아이는 비싸잖은 과자 둘과 요구르트 제품 하나만 고르더라고 했다. 과자는 제가 먹을 것이로되, 요구르트는 집에 있는 중증 장애 친구에게 갖다 줄 '약'이었다. 같은 스님에 의해 돌봐지고 있는 그 친구의 또 다른 고질인 변비에 좋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저 어리고 덜 여문 게 외출 나와서까지 더 힘든 친구를 먼저 생각하다니! 웃을 때 표정과 눈망울이 꼭 코끼리를 닮는다 해서 붙여줬던 별명이 그대로 들어맞은 셈이기라도 하다는 얘기인가? 아이의 선한 마음에 감동한 '할배'가 "뭐든 갖고 싶은 걸 얼마든지 골라라"고 또 권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맥주를 한 병 집어들었다. 그건 우리 일행을 위한 선물이었다. 아이의 배려가 거기까지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즈음 어떤 신문에 놀라운 얘기가 하나 실렸다. 장애인 재활병원 건립을 추진 중인 한 慈善(자선) 재단의 후원 통장에 무려 1천만 원이나 되는 거금이 입금됐다는 것이 말머리였다. 재단 측이 온갖 노력 끝에 찾아낸 송금자는 작년 일 년간 한 외국 은행에서 중요한 업무를 맡아 돈을 벌었다는 사람이었다. "그동안 모은 걸 어디에 쓸까 고민하다가 '운 좋게' 자선 재단을 알게 됐다" "남한테 도움 줄 수 있는 것이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다" "남에게 희망을 준다면 그것보다 더 기쁜 축복이 어디 있겠느냐"고 했다.
자선 재단 측은 누군지 모를 사람이 별도의 연락도 없이 거금을 보내 놓은 데 놀랐던 듯했다. 하지만 필자는 다른 일로 놀랐다. 주인공이 불과 27세밖에 안 되는 젊은 여성이란 사실이 그것이었다. 그런 젊은이에겐 남 주기보다 제 앞날 위해 저축하는 데 마음 쓰는 게 더 어울릴 터. '큰 희사'는 千辛萬苦(천신만고)를 통해 인생을 관조하게 된 노신사에 제격일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주인공은 돈 많이 들 외국 유학을 곧 떠나기로 돼 있기까지 한 젊은 여성이었다. 어떻게 그 젊은 나이에 그렇게 탁 트인 큰 마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근년 드물게 혹독한 여름이 계속되고 있다. 국제 정세도 그렇거니와 국내의 물고 뜯는 꼬락서니들도 그 폭서 못잖게 참혹하다. 그런데도 우리가 쓰러지지 않고 견뎌내는 것은, '사람들의 숲' 속에서 표 안 나게 작동하는 '사랑' 덕분이 아닐까 싶다. 코끼리 동자의 선한 마음은 올해 三伏(삼복) 최고의 피서 선물이었고, 27세 나이에 네팔 산지를 걸으며 '어떻게 살까'를 고민했다는 그 젊은 기부자는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줬다.
마침 이장무 서울대 총장이 지난 1일 취임사에서 "서울대가 앞으로는 나누고 베풀고 희생하는 리더의 양성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동안 지식 함양에 급급해 실천적 지혜인 '프로네시스'(phronesis)를 터득게 하는 데 소홀했다"고 반성한 것이다. '프로네시스'는 어떻게 행동해야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는지를 판단할 줄 아는 지혜라고 했다. 듣던 중 싱그러운 소리였다. 그리고 1천만 원 희사자는 바로 그 대학 졸업생이었다. 총장의 선한 '부름'에 제자가 며칠 만에 곧바로 '부응'한 것 같아 더위가 또 한 발자국 달아나는 듯했다.
박종봉 논설위원 paxkore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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