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열(金潤烈·46) (주)데이콤 상무는 회사가 고비에 처할 때마다 능력을 십분발휘, 재도약시켰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같은 능력을 인정받아 팀장(부장)에서 지난해 상무이사로 고속 승진하기도 했다. 입사한 지 불과 19년만이었으며, 회사 설립이래 전례가 없던 일이라고 한다.
이 길로 뛰어든 계기는 "미래에 가장 유망한 산업이 될 것"이라는 지도 교수의 조언때문이었다. 입사 당시만 해도 IT 산업 자체가 국내에서는 태동기에 불과했던 데다 개인적으로도 대학(경북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해 이 분야에 대해선 거의 문외한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입사 직후 6개월 과정의 IT 전문교육을 받았던 게 든든한 밑천이 됐다. 대학을 졸업하던 1986년 봄, 당시에는 (주)한국데이터통신이었던 이 회사에 공채 8기로 입사한 뒤 동기 100여명중 30여명을 뽑은 IT 전문교육생 1기가 됐던 것이다. 국내에 태부족이었던 관련분야 전문인력을 육성하기 위해 회사가 교육 과정을 개설했던 것. "통신사관학교로 불렸던 IT 교육과정을 이수하는 동안 합숙을 하면서 밤샘 토론과 공부를 하는 등 개인적으로 가장 열심히 생활했던 것같다."고 했다.
교육을 마친 후 정부부처 행정전산망 사업본부에 소속돼 상공부의 전산망 작업과 소속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한 관련교육을 맡았으며,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는 올림픽 사업본부로 옮겨 각종 경기의 전산화 작업 등을 했다.
국제전화사업 시장에 뛰어든 지난 91년부터는 국제통신사업본부 사업기획과장을 맡아 5년정도 일했으며 이 기간동안 회사는 국제전화 시장의 20%를 점유하는 성장세를 보였다.
98년에는 전화사업팀장으로 옮겨, 해마다 수백억 원의 적자를 보였던 시외전화 사업을 2년만에 흑자로 되돌려 놨다. 또한 2002년부터는 국제전화사업팀장을 맡아 국내 업체들간의 과열 경쟁으로 어려움에 처해있던 회사를 재도약시키기도 했다.
결국, 이같은 능력을 인정받아 2005년에는 전화사업담당 상무로 승진했으며, 미국 현지법인의 사장직까지 겸하게 됐다.
대구에서 생활하고 있는 7순의 노부모때문에 자주 지역에 들른다는 김 상무는 "대구의 상가가 갈수록 썰렁해져 안타깝다."며 "주력 산업이 침체돼 있는 만큼 경제가 되살아나기 위해서는 수도권에 있는 기업들을 유치하는 데 적극 나서야 한다."고 했다. 지난 60년 대구 대현동에서 1남2녀중 장남으로 태어나 신암초교와 중앙중·영신고를 졸업한 뒤 79년 경북대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서봉대기자 jinyo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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