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61년만에 인정' 강제징용 할아버지의 '눈물'

제갈태조(87) 할아버지

제갈태조(87·대구 달성군) 할아버지는 한숨만 내쉬었다. 이리 저리 몸을 뒤척이지만 옛 생각에서 좀체 헤어나질 못한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지난 3월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서 보내온 한장의 서류를 든 채 끝내 눈물을 쏟았다. '제갈태조는 특별법 제 17조에 의거, 일제강점하 강제동원에 의한 피해사실이 인정되는 자로 결정함.' 그러나 이 서류도 답답한 심정을 달래주지는 못했다. 한 문장의 서류를 통해 피해사실은 인정받았지만 최종 심사가 이뤄져 보상이 되려면 아직도 더 기다려야 하기 때문.

정부는 지난 3월 해외로 징용돼 장애를 입은 사람과 현지사망자 유족에게 최고 2000만원의 위로금을 지급하지만 생존자와 생환후 사망한 징용자의 유족에게는 한 해 50만원 한도 내에서 의료비 혹은 자녀 교육비를 지급한다는 등 내용의 '일제강점하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을 마련했으나 아직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피해생존자들의 경우 특별보상은 없고 의료지원 등만 있을 뿐이어서 불만을 사고 있다.

제갈 할아버지가 22살이던 1942년 봄. 일제의 인력징발 광풍이 몰아쳤다. 제갈 씨 집성촌으로 60여 가구가 모여 살던 당시, 경북 달성군 논공면 본리 주변도 예외가 아니었다. 인력징발 할당인원을 채워야 했던 면서기는 "아무도 안 가려고 하면 전체가 가야 한다."며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비뽑기로 2명을 뽑았다. 10여 명의 동네 젊은이 중 제갈 할아버지와 그의 먼 친척(12촌)인 19살 청년 제갈유권(1981년 사망) 씨가 뽑혔다.

대구역 맞은 편 종일여관엔 달성군 젊은이들만 300여 명이 모여 발디딜 틈 없었다. 모두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이들을 태운 배는 현해탄 건너 홋카이도 넘어 사할린 섬에 멈췄다. 이들이 끌려 간 곳은 미츠비시 탄광.

생전 처음 보는 채굴 막장 안에서 석탄을 캐야 했다. 오전 5시에 일어나 오후 7시까지 일하는 중노동이 계속됐다. 허기만 면할 정도의 적은 급식으로 배가 너무 고파 잠 못드는 날이 이어졌다.

1944년 여름엔 남쪽 규슈지역으로 끌려갔다. 사시오 사케도 탄광. 탄광 굴높이는 1m가 채 안돼 허리 숙이는 것도 모자라 목까지 꺾어야만 했다. 눈속으로 석탄가루가 날아 들었고 바닥엔 물이 흘렀다. 같이 일하던 인부들이 무너져 내린 굴속에 갇히는 사례가 부지기수. 압사로 원혼이 되는 사람도 적지않았다.

탈출하다 발각되면 뭇매를 맞아야 했다.

"얼마나 심하게 때리는지 탈출하려던 마음이 싹 달아날 정도였지. 결국, 해방을 맞았지. 기적적으로 유권이도 내가 고향으로 돌아온 1주일 뒤 귀환해 고향에서 얼싸 안았지."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징용 피해에 대해서는 수십년동안 일본 정부는 물론, 한국정부도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 피해자로 인정받았지만 유권 할아버지는 이미 25년 전 한을 품은 채 저 세상으로 떠났다.

"아직도 관련 서류나 기록이 없어 피해사실을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 많아요. 일제가 얼마나 가혹했는지, 식민지 역사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 피해를 본 우리가 증언해야 하는데, 생존자는 점점 사라지고... 이제서야, 증언자를 찾는다고 하니. 먼저 간 징용 피해자들에게는 미안할 따름이야."

한편 일본 정부가 공식 인정한 조선인 징용자수는 66만 7천여 명. 그러나 태평양전쟁유족회가 최근 공개한 한·일회담(1965년) 6차 회의록에 따르면 한국 측이 당시 협상과정에서 일본 측에 제시한 강제 징용자수는 103만 명이었다.

김태진기자 jin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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