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벌은 존재해야 한다고 봅니다. 학교도 하나의 작은 사회니까 교칙을 안 지키면 벌칙이 주어져야 하니까요."
"학생이 학교의 주인인데 왜 학교에서 일방적으로 교칙을 만들어놓고 지키도록 강요합니까. 학생은 인권도 없습니까."
지난 15일 대구 중앙도서관 4층 세미나실. 50여 명의 중·고교생이 참가한 가운데 '공개 독서토론회'가 열렸다. 권진혁(17) 군은 '체벌에 대한 입장'을 놓고 대학생 형과 한창 토론 중이었다. 권 군이 속한 10명의 토론팀은 최근 대구의 한 고등학교에서 불거진 과잉체벌과 관련해 '체벌, 사랑의 매냐, 폭력이냐.'를 토론주제로 정했다. '찬성' 쪽에 손을 든 권 군은 서툴게나마 상대편 의견에 반박하느라 노력하고 있었다.
반면 사회부터 토론까지 중·고교생들로만 구성한 다른 팀은 진행에 애를 먹고 있었다.
"작가 황석영에 대해 조사해 온 사람 있어요?" "……."
책 '삼포 가는 길'을 주제로 정했지만 입을 먼저 여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사회를 맡은 박은경(16) 양은 "학생들의 토론 태도가 소극적이어서 힘들었다."고 했다. 박 양은 그러나 "공개토론을 거듭하면서 나도 모르게 적당한 사례도 들 수 있게 됐고 말솜씨가 많이 늘어난 것 같다."고 했다.
토론식 수업이 주목받고 있다.
하나의 이슈를 놓고 찬·반 입장을 정해 자유롭게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토론식 수업은 단순한 '말(言)의 기술'을 넘어 의사소통 능력과 문제해결력, 창의력을 길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론식 수업을 학교 현장에서 적용하기란 쉽지 않다. '과묵한' 대구·경북에서는 더욱 그렇다. 한 서울 출신 교사는 "서울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 대구로 내려와 보니 학생들이 알면서도 대답을 하지 않아 놀랐다."면서 "서울에서는 틀린 답도 씩씩하게 발표하는 아이들이 많다."고 했다.
이런 가운데 토론식 수업 기법을 활용해 학생들의 말문을 틔우고 사고력을 넓히려는 시도가 단위 학교별로 이뤄지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입시 교과 위주의 빡빡한 커리큘럼 속에서도 재량활동 시간 등을 이용해 토론문화를 싹 틔우고 있는 것이다.
홍성희(기술·가정과) 서남중 교사는 '배심원식 토론' 기법을 수업에 활용하고 있다.
반 학생들 중 4, 5명을 대표(배심원)로 뽑은 뒤 찬·반 팀으로 나누고 토론을 시키는 방식이다. 학생들은 미리 토론 주장문을 써 오고, 교사는 토론이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보조하는 역할만 한다. 나머지 학생들은 배심원 의견에 대해 자기의 입장을 보탠다. 이를 테면 TV 토론회 방식이다.
홍 교사는 "반 전체가 토론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고 혼자 발표시키면 토론에서 소외되는 학생이 생긴다."며 "처음에는 토론 주장문을 읽는 수준이던 학생들이 이제는 남의 의견을 경청하게 됐고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습관도 길러지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홍 교사는 학창시절 이성교제, 가정내 여성과 남성의 역할, 외모지상주의, 다이어트 등 주로 가정 교과 단원과 연결해 주제를 정했다. 그의 수업은 다음달 '대구 중등교사 수업발표대회' 결선에 선 보일 예정이다.
대구 덕원고는 1학년 14개 반 전체가 매주 화요일 오후 '담임 토론'을 벌인다. 2년째다. 담임교사가 한 주 전에 주제를 정해 주고 학생들은 자유토론을 통해 서로의 입장을 듣는다. 두발규제, 체벌, 남녀 공학, 성차별 등 여러 주제를 다뤘다. 독서토론도 1회씩 하고 있다.
최진태(윤리과) 교사는 "비유하자면 노래방이 일반화되면서 한국 사람들의 평균적인 노래실력이 향상된 것처럼 남 앞에서 발표할 수 있는 자리가 많이 마련되면 말 기술은 좋아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최 교사는 그러나 요즘 e 러닝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이런 대면 교육이 소홀해지는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대구 동문고에서는 매년 초·중·고교생을 대상으로 토론대회를 열고 있다.
전광도 교장은 "대구 학생들이 서울 학생들에 비해서 말솜씨가 떨어진다는 의견이 많지만 실제 토론을 벌여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며 "학생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토론 습관은 입시뿐 아니라 사회 진출 후에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김미숙 한국교육개발원 입시제도실 연구원은 서울 강남지역 학교, 중위권 학교, 하위권 학교의 수업을 관찰한 결과 대부분 중·고교에서 토론 수업이 아직 정착되지 못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김 연구원은 "우리 사회에서는 상대의 주장을 잘 듣고 자신의 얘기를 설득력있게 표현하는 문화가 굉장히 열악하다."며 "이런 수업을 적극 활용하는 교사에 대한 교육당국의 지원과 학교장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했다.
최병고기자 c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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