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아버지가 들려주는 옛이야기)선비는 오직 한마음

내일이 바로 더위가 물러간다는 처서 날이로구나.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주둥이가 비틀어진다.'는 속담이 있지. 그렇게 무덥던 여름도 결국은 가을에 떠밀려 물러가게 된단다. 모든 것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흘러간다는 교훈을 주고 있구나.

연산군 때의 일이란다.

정평부사로 일하던 유기창(兪起昌)이라는 신하는 임금의 잘못을 상소하다가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멀리 거제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단다.

거제도에는 유기창 말고도 두 사람이나 더 귀양을 와 있었는데 그들은 날마다 산에 올라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절을 올리곤 하였다는구나. 비록 자신을 귀양보낸 임금이기는 하지만 한번 맺은 인연을 저버릴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지.

어느 날 금부도사가 와서 한 사람씩 데려가 차례로 처형하자 마지막으로 남은 유기창도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지.

그러던 어느 날, 관청의 배가 바다를 건너오는 것을 보고 유기창은 둘레의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단다. 그런데 뭍에 오른 심부름꾼은 유기창을 잡으러 온 것이 아니고 뜻밖에도 중종(中宗)이 새로 임금이 되었는데 유기창에게 병조참지(兵曹參知), 그의 아들 유여림(兪汝霖)에게는 한림(翰林)이라는 벼슬을 내렸다는 소식을 전하였지. 모였던 사람들이 자기 일처럼 기뻐하였으나 유기창은 도리어 엄숙하게 말하였대.

"나는 물러난 옛임금의 신하입니다. 마땅히 옛임금을 위하여 울어야 되겠소."

그리고는 자리를 펴고 북향하여 큰 소리로 울었다는구나. 그리고는 아들에게 편지하기를 '너는 새 임금으로부터 처음 벼슬을 받았으니 마땅히 나아가 충성을 다하여라. 나는 비록 새 임금의 부름을 받았으나 옛임금의 신하이다. 선비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한다 하였으니 나는 이 길로 고향으로 돌아가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농사만 지을 것인 즉, 혹시 내가 죽더라도 옛임금으로부터 받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라는 벼슬 이름만 쓰지 새 임금으로부터 받은 높은 관직명을 쓰지 말도록 하라.'고 하였지. 그리고는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 평생 동안 농사만 지었지.

그 뒤에 유기창의 인품이 훌륭한 것을 알고 중종이 몇 번이나 그를 불렀지만 결코 다시 나오지 않았단다.

그 밖에도 당시 연산군에게 바른 말을 하다가 쫓겨난 선비로는 김숭조(金崇祖), 남세주(南世周), 홍언충(洪彦忠) 등이 있는데, 이들도 모두 중종반정 이후 조정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단다. 왜냐하면 그들의 인품이 모두 훌륭하였기 때문이지. 그런데 이들도 한결같이 벼슬을 물리치고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단다. 모두 유기창과 같은 생각에서였지. 김숭조는 일부러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핑계를 대었고, 남세주는 깊은 병이 있다며 벼슬을 거절하였다는구나. 그리고 홍언충은 홀어머니가 편찮으시다는 핑계를 대었고…….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은 이러한 선비들을 높이 기리고 있는 것이란다.

여름이 지나면 어김없이 가을이 오듯이 모든 일에는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

얘야, 다가오는 가을에는 더욱 깊이 생각하고 실천하거라.

심후섭 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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