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론]사행심에 들뜬 사회

얼마 전 대법원장이 국민에게 사과한 '사건'은 우리 모두를 놀라게 했다. 후회에 앞서 깊은 자성이 있었다면 그 사과는 불필요했거나 더 믿음직했을 것이다. 이 사과의 동기가 된 법 종사자들과 관련브로커와 부적절한 관계는 국가의 공신력에 대한 깊은 상처를 안겨주었고, 사회에 회자되던'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비아냥거림을 확인시켜준 꼴이 되었다. 그럼에도 대법원장이 사과하는 것을 보면서 법조계가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대 쪽에 무게를 두려고 했다.

'성인오락기'사건이 터지면서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해치는 독버섯이 여기에까지 이르렀구나 하는 충격은 다시 절망 앞에 서게 한다. 이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걱정스러운 것은, 대처 방향이 이 사건의 배후에 숨겨져 있는 우리 사회의 건강성 여부보다는, 책임소재를 밝히려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성인오락기'사건은 우리 사회 질서와 가치관이 철학적인 결함을 내포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한 사회를 이끄는 철학의 문제가 정책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정책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드러난 부정 부패는 심각한 것이긴 하지만, 그 철학에 우선하는 과제는 아니다. 국민 대다수가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정치인들이 상투적으로 외쳐대는 '우국충정'적인 정치 공세 차원이 아니다. 현 정권과 각을 세우고 사사건건 비판적 시각으로 대하고 있는 '보수언론'들의 '흠집내기'적인 미시적인 시각은 더구나 아니다. 한 공동체의 기본이 흔들리고 사회적 지향성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더 근본적인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성인오락기'가 지향하는 가치관은 한마디로 射倖心(사행심)이다. 그 점에서 순수하게 오락을 즐기도록 보조하는 여느 오락기와는 다르다. 인간생활에서 노동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휴식이요, 그 휴식을 복되게 하는 것이 오락이다. 휴식은 오락과 함께 상승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데에 기여한다. 그런데 이번에 드러난 '성인오락기'는 노동과 휴식을 돕는 기구가 아니라 사행심과 투기심리를 교묘하게 얽어매어 인간을 정상적인 근로생활에서 일탈시키는 마법적인 기구다.

'성인오락기'가 놀기를 좋아하고 일하기를 싫어하는 인간의 타락된 심성을 부추기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인간의 타락된 심성은 정직 근면과 절제를 싫어하고 땀흘리지 않는 소득을 원하고 일확천금을 갈구한다. 이런 인간심리를 합법적으로 풀어내기 위해 라스베이거스와 강원랜드가 등장했고 경마장과 각종 '성인오락기'가 나타났다.

사행심을 부추기고 도박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할 수도 있는 이 사업에 정부가 정책적 판단을 신중하게 내리지 못했다는 인상을 받는 것은 안타깝다. 아직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2만 달러, 3만 달러의 고지를 향해 매진토록 독려해야 할 정부가 국민의 주의집중력을 흐리게 하는 그런 사행사업으로 정책적 판단을 유도했다면 이건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 그릇된 판단은 단순히 국민의 심성을 타락으로 오도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다시 돌려 개혁하는 데에 막대한 인력과 비용을 감수토록 만든다.

사행심에 찌들면 노동의 건강성은 상실된다. 찰나적이요 향락지향적인 삶을 추구하게 된다. 조급하고 신경질적으로 되며 자아가 사라진다. 이성보다는 이해관계에 민감하게 되고 장기적 거시적인 안목보다는 단기적 미시적인 관점이 목소리를 높이게 된다. 이런 심리가 동력화되면 사회전반에 여러 가지 파장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권위주의를 몰아낸다면서 권위마저 부정하게 되고 국가의 공권력마저 무기력하게 만든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런 병리현상들은, 이념과 이론으로 근사하게 포장돼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지만, 사실은 찰나적이고 도발적인 심리와 무관하지 않다.

막스 베버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자본주의는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하여 정직과 신용, 근면과 절약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성립, 발전되어 왔다. 자본주의의 건강성은 이런 자본주의 정신을 굳건히 할 때 담보되는 것이다. '성인오락기'사건은 우리 사회의 병리적 현상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치유하여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것은 우리 공동체를 편달하는 국민의 건강한 상식이요, 언론의 불편부당한 정론이요, 지성인의 예언자적인 외침이다.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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