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 꿈 나의 삶, 김연철](5)호랑이는 풀을 먹지 않는다

아버지는 6척이 넘는 건장한 체구에 정신 또한 옳고 곧으셨다. 젊은 사람들은 물론 동네 어른들도 아버지 앞에서는 사리에 어긋나는 행동이나 진한 농담을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아주 자상하고 인정이 많아 사람들이 따랐다. 일화도 많았는데, 한 예로 젊은 사람의 조끼 주머니에 담뱃대가 보이면 불문곡직하고 대를 빼앗아 분질러 버렸다.

어머니가 사랑, 자애, 포용의 어진 정으로 우리의 선한 마음을 길러주셨다면 아버지는 엄격, 질책, 훈육으로 강인한 정신력을 키워주셨다. 이 두 정신문화가 조화를 이루어 우리를 인간되게 하신 것 같다. 당시 우리집에 자주 오시던 초등학교 김예환 교장선생님이 아버지를'有德君子(유덕군자)'라 하셨다. '바른 마음으로 사물을 대하면 비록 책을 읽지 않더라도 덕 있는 군자가 될 수 있다.'는 문장에서 따온 말이다. 아버지는 옳지 못한 일로 세속에 영합해야 할 일이 생기면 "호랑이는 풀을 먹지 않는다."고 하시며 지조를 지키셨다.

1962년 1월, 음력 섣달그믐 전날이었다. 설에 사용할 새 자리를 짜는데 아버지가 "연상(동생)이 혼인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시기에 그때 동생의 나이 26세이므로 "천천히 해도 늦지 않습니다." 대답했더니 "야야 옛날부터 20전에 자식이요, 30전에 재물이라고 하지 않더냐." 하시므로 "아버지, 요즘 세상은 자식은 자식대로, 부모는 부모대로 사는 세상이지 자식에게 의지하는 세상이 아닙니다." 하고 별 생각 없이 대답했는데 이 한 마디가 천추의 한이 되고, 씻을 수 없는 불효가 될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아버지는 짜던 바디를 힘주어 내리쳐서 노끈이 완전히 떨어져 못쓰게 하신 다음 "똑똑한 자식 두었구나, 애비가 자식에게 의지하는 세상이 아니라?"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니 나가거라!" 하시면서 크게 화를 내셨다. 할 수 없이 뜰에 나가 꿇어앉아 빌어도 식음을 전폐하고 문을 걸어 잠가 누구도 용납하시지 않았다. 종일 빌었다. 섣달그믐인 그 이튿날도 새벽닭이 울 때까지 뜰에 꿇어앉아 빌었다. 초하루가 되었다. 처와 같이 세배를 드리려고 해도 그마저 허락하시지 않았다.

이튿날 근무지 안동에 가야 했다. 나와 처 그리고 아들 둘과 함께 사랑 앞뜰에 자리를 깔고 세배 겸 출타 인사를 드렸으나 역시 나에게만 외면하시고, 손자 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너희들은 애비를 닮지 마라!"고 하셨다. 이 또한 마지막 작별이 될 줄이야.

1962년 4월 8일 일요일 새벽, 학교 숙직실에서 전화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택시를 전세내어 고향집으로 달려갔다. 차 안에서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언제나 말씀하시던 "호랑이는 풀을 먹지 않는다."라는 말씀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는 더 슬피 우셨다. 나 때문에 돌아가신 것 같아 죄책감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시신을 끌어안고 몸부림치다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입으로 핥아 보았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튿날 염도 못하게 붙들고 울었으나 모두가 허사였다. 내가 대신 관에 들어가고 싶었다. 오는 8월, 아버지 회갑 때는 동네가 떠나갈 듯 큰 잔치를 해드리고 싶어, 돈도 300만 환이나 모아두었는데, 모두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는 불효자의 마음을 모르신 채 떠나셨다.

평생 죄의식을 벗지 못한 나는 가끔 물어본다. "아버지 이제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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