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슨 크루소의 사치/ 박정자 지음/ 기파랑 펴냄
옛 북미 인디언들은 겨울 축제에서 한 부족이 다른 부족을 초청해 잔치를 벌이면 다음엔 상대 부족이 이쪽 부족을 초대해 더 푸짐하게 음식을 대접했다. 다음엔 이쪽 부족이 다시 상대 부족을 초청해 환대받은 것보다 더 많은 음식으로 대접했다. 선물도 경쟁적으로 더 비싸고 좋은 것을 가지고 갔다.
끝없이 되풀이하는 경쟁은 양쪽 모두 자기가 가진 물건이 남아있지 않아서 더 이상 환대나 선물 경쟁을 벌일 수 없게 될 때까지 계속된다. '포틀라치(potlatch)'라 불린 이 관습은 미친 듯이 물건을 낭비하고 파괴하는 것으로 '검약(儉約)'을 미덕으로 여기는 한국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는 인디언들이 자행했던 이 '낭비'라는 것은 '모든 문명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 원리'라고 보았다.
낭비를 통해 부가 순환되고 예의가 교환됨으로써 정서적인 공동체를 형성하는 기능도 있다는 것이다. 낭비를 긍정적으로 바라본 것이지만 동서고금의 모든 시대, 모든 사회의 귀족 계급들은 쓸데없이 낭비함으로써 자신들의 우월성을 확인했다. 상위 계급원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한 이른바 '과시적 소비'의 모습이다. 상류층의 낭비 습관은 상류로 올라서기 위해 노력하는 중간층에게로 확산되면서 계급의 문제로 확대됐다.
이렇게 되면서 소비는 단순히 사물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상류층이라는 상징 혹은 이미지, 기호의 소비로 전이됐다. 형식적이나마 계급이 사라진 현대사회에서 이런 현상은 더욱 두드러졌다. 사치재 소비가 더 이상 상류계급의 기준이 아니게 되자 보통 사람들과 '다름', '차이'를 추구하는 상류층은 오히려 '검소'와 '노동'을 신분의 상징으로 삼게 됐다.
지은이의 언급대로 '중간층이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면 재벌 총수는 5천 원짜리 순두부를 먹고, 평사원들이 BMW 같은 외제차를 타면 재벌 회장은 값싼 자동차를 타거나 짧은 거리는 되도록 걸어다닌다.'거나, '중간층이 해외여행을 즐기고, 골프나 스키 같은 고급 스포츠에 몰두하면 재벌 사장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하느라 잠은 비행기에서 자고 식사는 햄버거로 때우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상류층을 오히려 더 부각시키는 것은 재화가 아닌 '문화'가 역할을 떠맡았다. 오랜 시간 접촉을 통해서 스며드는 것이 특징인 문화는 '돈이 생겼다고 갑자기 백화점에 나가 구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미술관을 돌아다니고 음악회에 가본 어린이들이 성장해서 이 문화를 계속 향유하게 되는 것이다.
앤디 워홀 등으로 대표되는 '팝 아트(Pop Art)'는 바로 대중과 밀접한 상품(캠벨 수프 깡통, 코카 콜라 등)이나 스타(메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등)를 주제로 택하고, 인공색소나 야광 안료 같은 싸구려 상업적 물감을 사용했다. 미술관에서 안주하고 있던 미술은 팝아트의 탄생과 함께 과감하게 대중 앞으로 다가간 것이다. 팝아트는 주제뿐만 아니라 '무한 복제'라는 대량생산 시대의 기술까지 받아들여 완벽하게 대중성을 확보했다.
기존 미술의 권위에 도전해 '예술의 민주주의'를 표방한 대중 예술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소장자를 상류층으로 만들어주는 기호가 됐다. 워홀의 반복적 이미지나 리히텐슈타인의 만화 복제 그림은 현대에 가장 권위 있는 문화적 아이콘이 돼 박물관 소장품이 됐다. 워홀은 세계 미술 경매 시장에서 피카소의 뒤를 잇는 가장 비싼 화가 반열에 올랐다.
책은 소비와 사치를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총아' 광고도 다루고 있다. 현대인들을 끊임없이 소비하게 하고 사치의 길로 이끄는 것이 바로 광고이기 때문이다. 광고는 이를 위해 소비하는 재화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육체를 동원한다. 소비자들은 이를 통해 자신이 사는 것이 재화가 아니라 육체가 품고 있는 숨겨진 이미지라며 착각한다. 좋은 옷, 멋진 자동차로 치장해 신분상승을 꾀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현대사회의 소비문화를 연구해온 지은이는 앙리 르페브르, 장 보드리야르, 마르셀 모스, 토르스타인 베블런, 롤랑 바르트가 제시한 다양한 분석 도구를 통해 '소비사회를 사는 현대인의 정경'을 담아냈다. 이를 풀어가는 방식은 '인문학의 대중화 혹은 팝아트적 인문학'.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과연 소비의 바다에 빠져 사는 현대인들이 이 책을 읽고 '자신의 타오르는 욕망이 실은 타인의 욕망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될까?' 하고….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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