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그렇지만 조기 축구회는 지난 80, 90년대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건강과 친목을 위해 아침 일찍 운동장에 모여 공을 차면서 붐을 일으켰다. 공 하나와 운동장만 있으면 가능한 축구와는 달리 야구는 운동장외에도 일정한 기본기와 장비 등이 필요하다. 따라서 일반인들이 동호회를 만들어 운동을 하기에는 다소 제약이 있는 셈이다. 그런데 감포에서는 무려 23년전인 1983년, 60대 이상 노인들이 모여 전국 최초이자 유일했던 감포노인야구회를 창립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분들이 병들고 세상을 떠나 결국 지난 6월 해산하고 말았지만...
◇국내 최초의 감포노인야구회=예전이나 지금이나 야구는 주로 학생들이나 30, 40대 직장인들이 즐겨하는 운동이다. 때문에 1983년 8월 14일 감포지역 노인 23, 24명으로 창립한 감포노인야구회는 당시로는 '파격'이었다. 백발의 머리와 돗수 높은 안경을 낀 60, 70대 노인들이 야구회를 만들었다는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야구회가 창립된 것은 이 지역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지냈고 고향에서 의사 개업을 했던 김종해(작고) 의 역할이 컸다. 미국에 갔을 때 노인들이 야구를 하는 모습을 보고, 고향에서도 노인야구회를 만들어 보자고 결심한 것. 처음에는 노인들이 무슨 그 위험한 야구를 하느냐고 반응이었지만 아침일찍 일어나 건강이나 다지고 생활의 활력을 찾고자 하는 취지에 하나 둘씩 동참해 야구회가 창립했다.
그야말로 학교 다닐때 '동네 야구'만 했거나, 야구 글러브 한 번 껴 보지 못했던 노인들로 구성됐지만 열정과 자부심은 대단했다. 태풍으로 바람이 많이 불때나 눈,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야구를 했다.
창립멤버인 우용이(87) 할어버지는 "아침일찍 운동장에 나와 준비운동을 한 후 캐치볼과 공을 치는 연습을 했던 것만으로도 건강유지에 도움이 됐다."고 했다. "매일 아침 야구를 해야만 하루 일과를 가뿐하게 할 정도로 생활의 활력을 찾았다."는 하영명(84) 할아버지. 두 분 모두 창립 멤버로 지금도 건강함을 유지하고 있는 비결중의 하나가 야구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66세의 나이로 감포노인야구회 창립에 산파역을 했던 양무줄(89) 할아버지는 "전국 어디에서도 노인야구회가 만들어졌다는 말은 듣지를 못했으니 아마 우리가 국내 첫 노인야구회가 분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어려움과 재미도 한꺼번에=비록 어촌의 아마추어 야구회지만 유니폼은 물론 회기(會旗)와 회가(會歌)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열악했다. 남의 신세를 지지 말고 회원들이 낸 회비로 운영하자는 취지를 계속해서 지키도록 노력했다. 새 야구공을 구입할 예산이 없어 연습 때는 헌 공을 주로 사용하는 바람에 손가락에 물집이 생기기도 했다고.
감포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주로 훈련을 하다 가끔씩은 전촌과 양북초교로 원정을 가기도 했다. 학교 유리창을 깬 것은 다반사였고, 슬레이트 지붕을 깨는 바람에 지붕에서 물이 샌다는 불평을 듣기도 했다.
노인들은 야구를 즐기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일주일에 한 번꼴로 자체 청백전도 치뤘다. 당시 야구회가 있었던 감포읍사무소, 감포수협, 소방대팀 등 4개팀이 번갈아 주최해 봄 가을로 교류전을 치루면서 실전 경험을 쌓았다. 권수문(79) 할아버지는 "교류전을 치룰 때에는 회원들의 부인과 그 가족들이 다 함께 모여 응원전을 펼치고 음식을 나눠 먹는 등 한마당 잔치였다. 야구 뿐만 아니라 선후배들이 모여 정을 나누는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이 야구회가 제법 알려지면서 몇차례 방송을 타기도 했다. 이후 유명세를 타 야구회 유니폼을 입고 다니면서 어깨를 쭉 펴기도 했다. 감포수협장을 역임했던 박종호(67) 씨는 우승기를 만들어 기증했고, 한 번은 삼성 김시진 투수(현 현대유니콘스 코치)가 감포노인야구회를 방문해 큰 힘이 되기도 했다. 또 일본의 센다이 인근 지역 야구회와 교류전을 추진했으나 성사되지는 못해 할아버지들은 지금도 아쉬워 하고 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야구회=감포노인야구회는 20명 내외의 회원들이 있어 자체 청백전도 충분했다. 하지만 '평생 청춘'이라고 생각했던 회원들도 세월의 흐름은 이겨낼 재간은 없었다. 고령으로 몸져 눕거나 세상을 떠나는 회원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면서 2000년대가 되자 자체 청백전은 고사하고 9명의 엔트리조차 구성하기 어려워졌다.
올해로 창립 23년째인 감포야구회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후배들이 야구회의 명맥이라도 이어 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게이트볼 등에 노인들이 몰리면서 야구를 하는 사람이 줄어 드는 등 여러가지 사정상 야구회를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많은 회원들이 세상을 떠나 10여명 남짓한 남은 회원들이 지난 6월 모여 야구회 해산 선언, 감포노인야구회는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그날 회원들은 너무나도 빨리 지나간 세월을 원망하면서 지난 23년 동안 치고 던지고 달렸던 그라운드를 생각하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비록 야구회는 해산했지만 오늘도 황억용(78) 씨 등 3, 4명의 회원들은 매일 아침 선배들이 뛰었던 운동장에서 캐치볼을 하면서 야구를 잊지 못하고 있다.
경주·김진만기자 fact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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