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순한 소주시대)직장인들의 '소주 토크'

지난 28일 오후 8시 대구의 한 막창집. 처음 만나는 자리인지 모두가 서먹서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그럴 땐 소주 돌리기가 최고. 소주잔이 몇 잔 오고 가자 서서히 이야기꽃이 피어난다.

가장 연장자인 류선동(54)씨가 실수담으로 첫마디를 연다. 류씨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애주가. 과거 한창 때 술을 많이 마실 때의 일이었다. 류씨는 "우리 집이 303동인데 술이 떡이 돼 밤 늦게 302동으로 잘 못 찾아가 초인종을 누를 때가 종종 있었다."고 털어놨다. 문이 열리고 모르는 사람이 나오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고 얼굴을 붉혔다.

아직 총각인 박준철(33)씨는 술이 여성과 친해지기는 그만이라고 했다. 박씨는 "처음 만날 땐 아무 이야기를 못하다 술이 좀 들어가면 전화번호를 묻는 습성이 있다."고 말했다. 술 덕분에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져 전화번호를 쉽게 알 수 있게 됐다는 것.

옆에서 지켜보던 김형동(40)씨도 말문을 연다. 지난해 12월 교수 임용 면접을 위해 미국에서 한국에 왔을 때였다. 대구에서 친구들과 모임을 가졌는데 너무 반가운 나머지 친구들의 만류에도 자정이 넘도록 술자리를 함께 했다. 김씨는 "다음날 오전 10시 비행기로 미국에 가야 하는데 연말이라 기차며 고속버스가 모두 매진되었다."고 토로했다. 고생 끝에 겨우 미니밴을 탔지만 서울에 도착하니 새벽 4시가 넘어 잠 한숨 못자고 부랴부랴 비행기를 탔던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김씨는 "고생은 좀 했지만 오랜만에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고 웃었다.

홍일점인 한순화(31·여)씨는 아무래도 여성이라 소주를 마시고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다고 우긴다. 한씨는 "술자리 분위기가 아무리 좋아도 정신을 끝까지 바짝 차린다."고 말했다. 끝까지 정신 집중을 한 뒤 집에 가서 그대로 뻗어버리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소주 예찬론이 이어진다. 김씨가 유학 시절을 회상했다. 김씨는 "외국에 있을 땐 조그마한 소주 팩이라도 소중한 선물이 된다."고 했다. 한국 사람은 물론이고 외국인들도 소주를 무척 좋아한다고 한다. 김씨는 "애주가인 일본 친구한테 소주를 선물했더니 뒤끝이 없다고 칭찬을 늘어놓더라."고 흐뭇해했다. 김씨는 소주에 대한 묘한 자부심이 느껴졌다고 했다. 류씨는 "소주가 뒤가 깨끗해 다음날을 위한 하나의 충전이 된다."고 말했다. 15년 전 건축사자격시험에 떨어진 탓에 오후 6시쯤부터 소주를 마셨지만 다음날 아침 정신 말짱하게 일어났다고 한다. 한씨는 "소주는 한마디로 화끈해서 좋다"고 했다. 단시간에 술의 목적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 저렴하다는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한씨는 "맥주는 3, 4명 뭉치면 보통 5만~6만 원은 족히 들지만 소주는 3만 원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전창훈기자 apolon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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