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 대전 후 유럽은 사회 문화적으로 급격한 변화의 길목에 있었다. 참혹한 전쟁으로 인간 존엄성의 상실을 경험한 일반 대중들은 사회 모든 분야에 만연해 있던 구시대의 허례허식과 소수 귀족들의 위선을 타파할 새로운 가치관과 생활양식을 갈망하고 있었다. 피카소가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감각을 가진 여성'이라고 극찬했던 코코 샤넬은 그 변화와 모색의 시대에 패션을 통해 구시대의 인습에 항거하며 새로운 여성상을 창조했다.
샤넬은 거추장스러운 레이스, 몸을 꽉 죄는 코르셋, 몸매를 강조하기 위해 심을 넣은 옷 등으로 학대받는 여성의 몸을 자유롭게 해 주었다. 그녀가 선보인 간결한 디자인의 모자, 편안하고 활동적인 여가복, 발목이 드러나도록 한 치마선, 속옷 재료로만 사용되던 저지로 만든 겉옷, 인조보석, 짧은 단발머리 등과 같은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패션은 새로운 시대정신과 여성상의 구현이었다. 샤넬은 새 시대에 걸맞은 삶의 자세와 정신을 가진 여성의 옷차림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녀는 옷이란 그 옷을 입는 사람의 신분뿐만 아니라 태도와 취향, 나아가 교양과 가치관까지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철학이 잘 반영된 '샤넬 슈트'는 특유의 절제미와 우아함으로 변덕스러운 유행의 변천을 넘어 오늘날까지도 클래식한 스타일로 애용되고 있다.
모든 위대한 창조는 예술가의 삶과 철학을 반영한다. 그 중에서도 눈부신 창조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혹독한 고통과 고독의 산물이다. 가난한 장돌뱅이의 딸로 태어나 수녀원에서 성장한 샤넬은 어머니와 언니, 동생, 연인의 죽음을 잇달아 목격하며 심한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강인한 의지로 절망과 좌절을 극복했으며, 새로운 도전정신으로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고 자신만의 개성을 표현하며 시대를 앞질러 갔다. 그녀의 파격적인 패션은 처음에는 엄청난 비난과 질타를 받았지만 많은 여성들이 결국은 그녀를 선택했다. 이제 샤넬이라는 디자이너는 가고 없지만 그녀의 철학을 담고 있는 다양한 샤넬 제품은 오늘도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그녀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샤넬을 생각하며 가짜 명품과 짝퉁이 넘치는 우리의 현실을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본다.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의 부재, 사회 전반에 스며있는 총체적인 진실성의 결여가 아무 죄의식 없이 가짜를 만들고 소비하게 하는 것이다. 겉치장에 투자하는 관심과 정성의 일부를 마음의 수양과 정신의 풍요를 위해 바친다면 얼마나 좋을까. '몸보다 양심에 꼭 맞는 옷을 입는 것이 좋다.'라고 한 톨스토이의 말과 샤넬의 치열했던 삶을 음미하며, 이 가을, 내 남루한 마음의 옷깃을 다시 여며본다.
추태귀 상주대 의상디자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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