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더위에 지쳐 올려 볼 새도 없이 뜨겁던 하늘은 어느 덧 눈이 시리도록 맑고 파랗다.
풍요의 계절, 결실을 앞둔 들녘에는 농부의 막바지 손길이 바쁠 뿐, 짙은 감청색 물빛은 노랗게 익어가는 벼이삭과 푸른 산세를 제 품에 안아 환(幻)의 실루엣을 그려낸다.
시간은 한결 여유로워졌다. 피서전쟁을 치렀던 북새통 계곡, 인적은 드물고 고추잠자리 떼만 오락가락 물수제비를 그린다. 먼 산 정수리에 살포시 내려앉은 뭉게구름도 한가롭다.
확실히 낮아진 체감온도는 오래된 친구처럼 반갑다. 차창을 스치는 소슬바람에 청량한 기운이 감돌자 길가에 핀 코스모스도 신이 난 듯 가냘픈 몸을 흔들어 댄다.
가을맞이 워밍업을 위해 나선 대구 인근 드라이브 길. 데면데면 지낸 일상을 접고 코발트 빛 하늘 닮은 싱그러운 행복을 마음 한 아름에 담아본다.
◆강창교~성주외곽도로~성주댐~대가천 무흘구곡
도심을 벗어나자 너른 가을들판에 가슴이 확 트인다. 전원 속을 달리는 승차감은 여느 때보다 부드럽다. 아직은 푸른색이 감도는 벼 잎사귀 사이로 고객 숙인 이삭이 노란 가을빛을 띠는가 하면 길가 한적한 시골 초등학교의 정겨운 교정은 의식을 잠시 유년시절의 추억으로 되돌린다.
성주읍 외곽도로를 돌아 대가면 방면 국도로 접어들면 하양, 주황, 분홍의 들꽃들과의 만남이 이뤄진다. 파란하늘을 배경으로 활짝 핀 꽃들이 산뜻하다. 대가면은 가야산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진 곳. 바람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엔 뭉게구름마저 움직임이 없다.
여유로운 드라이브 길을 한참 달리다 보니 길옆 코스모스가 초가을 바람에 제 흥이 겨운 듯 군무를 춘다. 연분홍, 주황의 꽃잎이 하늘거리는 모습이 수줍은 새댁의 몸놀림을 닮았다.
이어 가천과 금수면을 접해있는 넓은 성주댐이 나타난다. 주위 산자락의 푸르른 녹음과 물빛이 만나 수면은 진한 감청색을 띠고 있다. 댐 주위를 따라 돌면 창밖으로 가을햇살과 산 그림자가 빚어내는 한 폭의 수채화가 댐 수면에 비쳐진다.
일주도로가 끝나는 곳은 59번 국도에서 30번 국도가 연결되는 지점. 대가천을 따라 펼쳐지는 무흘구곡의 경치가 뛰어난 길이 계속된다.
이 길은 한 모퉁이 두 모퉁이 돌아갈수록 허옇게 속살을 드러낸 자갈과 너럭바위 사이로 맑은 대가천이 흘러 주위 풍광이 드라이브의 백미를 이룬다. 무흘구곡은 대가천의 아홉 물굽이 마다 형성된 절경을 자랑한다. 그 중 배바위와 선바위, 티끌 한 점 없는 계류가 깎아지른 절벽을 돌아 흘러내리는 사인암은 단연 길손을 차에서 한 번 쯤 내리게 하는 장소로 유명하다.
◆운문면 대천삼거리~삼계리 계곡~운문령~산내네거리~운문댐
청도읍 운문면 대천삼거리부터 시작해 삼계리 계곡과 운문령을 거쳐 산내네거리를 돌아 다시 운문댐으로 되오는 길이다. 전형적인 목가적 전원풍경을 즐길 수 있는 드라이브 길이다. 길가 벚꽃나무와 사루비아 꽃이 친구가 되고 멀리 보이는 농가마다 한 두 그루씩 심겨진 감나무, 복숭아나무가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다. 길가에 늘어선 복숭아 노점상 아낙의 그을린 얼굴빛도 정겹다.
예쁘게 조성된 꽃길과 쉼터도 볼 수 있다. 잠시 벤치에 걸터앉아 먼발치 고향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산과 들을 바라보면 왠지 모르게 젖어 콧등이 찡하고 가슴엔 싸한 감정의 물결이 밀려온다.
운문사 초입에서 언양 방면 69번 지방도를 따라가는 길은 깊은 삼계리 계곡과 함께 하는 여정. 울창한 숲과 길가까지 뻗은 나뭇가지들로 인해 시야가 좁혀져 2차선 아스팔트길은 숲 속 오솔길이 된다. 이 길을 몇 굽이돌아 맞닥뜨린 곳이 운문령이다. 트럭을 이용한 간단한 먹을거리와 커피를 파는 간이 휴게소가 있다.
굴곡이 심한 운문령을 내려오면 동창천 물길 따라 아름다운 펜션들이 드라이브의 또 다른 재미를 더한다. 동화 속에서나 나올법한 예쁜 집들이 한 번쯤은 머물고 싶은 욕심을 불러낸다. 그 대신 도로사정은 전만 못해 덜컹거리는 구간도 있다.
산내네거리에서 재차 20번 국도로 접어들면 운문댐 방향. 길은 핸들을 자주 좌우로 크게 조작을 할 만큼 굴곡이 심하다. 하지만 적당한 몸의 쏠림이 드라이브 재미를 더한다.
이윽고 운문댐이 훤히 보이는 지점에 이르면 망향정에 올라보자. 비록 콘크리트로 만든 누각일지언정 댐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고 수몰이전 마을 풍경을 찍은 사진들이 전시돼 있어 과거와 현재의 댐 풍경을 비교해 볼 수도 있다.
◆파군재삼거리~파계사삼거리~가좌삼거리~한티재~군위 삼존석불
대구도심에서 가장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드라이브 길 중 하나가 팔공산 일주도로와 한티재 너머 군위 삼존석굴까지 가는 거리. 여유를 가지고 가족들과 함께 반나절의 나들이 코스로 손색이 없다.
흔히 즐비한 식당가가 팔공산의 경관을 가로 막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곳곳에 자연친화적인 카페와 외관이 아름다운 식당들이 눈에 띄어 그런대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일단 이 길로 드라이브를 나서면 도심 소음과 공해 때문에 꼭 닫아 두었던 차창을 활짝 열어 심호흡을 해보자. 숲이 만들어낸 신선한 공기를 폐 깊숙이 들이마시면 기분부터가 달라진다.
한티휴게소 길 옆 이슬 머금은 무궁화도 평소보다 더욱 함초롬하다. 팔공산도립공원관리사무소 옆 나무계단을 따라 난 언덕길은 파군재로 이어지는 2km의 산책길. 팔공산 스카이라인을 훤히 볼 수 있다. 이곳에서 삼존석굴까지가 7km. 주변 이색적인 식당의 풍경을 둘러보며 달리면 금세 삼존석굴이 나온다.
휘어진 소나무가 내방객을 반기듯 서 있는 입구에서 개울을 건너 찾은 삼존석굴은 팔공산 북쪽계곡 학소대 천연절벽의 자연동굴에 모셔진 석굴사원으로 경주 토함산 석굴암보다 약 100여 년 앞선 7세기 말 조성됐다.
삼존석굴 앞에 잠시 서 지나온 길을 더듬어보니 숲 속 산길은 구름이 화환처럼 퍼져 있고 숲 바람소리, 물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길 따라, 물 따라, 혹은 마음 내키는 대로 내달렸던 길은 어느 새 마음의 때를 벗는 수심(修心)의 노정이 된다.
글·사진우문기기자 pody2@msnet.co.kr
작성일: 2006년 09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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