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옛 그림의 마음씨

옛 그림의 마음씨/ 이우복 지음/ 학고재 펴냄

'뛰어난 애호가는 말 없는 미술사가'.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이우복 전 대우그룹 부회장의 책을 읽고 서양의 한 미술사학자의 말을 떠올렸다. 책 앞에서 "콘크리트 숲의 백척간두 위에서도 나는 1퍼센트의 짬을 빌려 예술을 꿈꾸고 자연을 명상하며 살아온 것"이며 "나는 그 1퍼센트에서 인생을 건져야 했다. 나는 1퍼센트의 자유로 나를 먹이고 재우고 살려온 것 같다."라고 할 정도로 지은이 이우복 씨는 '뛰어난 미술애호가'이다.

사실 이 씨의 성장배경을 봐서는 이 씨가 유난히 미술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점이 있다. 충남 서천군의 한 농촌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상경해 경기고와 연세대 정치학과를 나온 엘리트,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과 고등학교 동무이자 대학 동창이라는 인연으로 굴지의 대기업을 일으키는 데 평생을 바친 이 씨다.

1999년 30여 년 동안 몸담았던 대우그룹을 떠날 때까지 뒤돌아볼 틈이 없는 삶을 보낸 이 씨였다. 일에 치이고 불면의 날들을 지새다 여러 차례 가사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퇴직한 뒤에야 비로소 삼겹살을 처음 먹어보고 그 맛에 감격했다고 하니 어느 정도였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럼에도, 이 씨는 미술에도 탁월한 안목을 지닌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미술 시장에서 '이우복'이라는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고, 미술 관계자들은 그를 '애호가 수준을 넘어선 감식안'이라고 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는다고 한다. 책은 이 씨의 '자전적 미술 에세이' 혹은 부제대로 "애호가 이우복의 '내 삶에 정든 미술'" 소개서이기도 하다. 모두 4부로 구성된 책을 통해 이 씨는 자신의 인생 이야기와 미술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어떻게 보면 미술과의 첫 만남 이후 애장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는 '아마추어 미술사가의 성장기'라고도 하겠다.

충남 서천의 어린 시절 기억부터 김우중 전 회장과의 만남, 학창 시절, 창업과 퇴직 등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있는 1장에서 이 씨는 '첫 그림을 만난' 이야기를 적고 있다. 예닐곱 살 때 군 소재지에 있는 숙부댁에 갔던 날 이 씨는 벽에 걸린 그림 한 점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색색의 밝은 꽃과 과일이 그려진, "지금 생각하면 이발소 그림이었을 '작품'은 아직 미의식이 개념화되어 있지 않던 소년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날 이후로 이 씨의 가슴 속에는 항상 '나도 저런 그림 하나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따라다녔다. 잘사는 친구네 집에 가서도 근사한 양옥이나 넓은 한옥보다 '그림상자'만이 탐날 뿐이었다. 첫 직장을 가지고 돈을 벌게 됐을 때에도 '배를 굶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과 함께 "내가 그림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환호"했다.

이후로 이 씨는 그림과 관련된 갖가지 일화들을 들려준다. 첫 월급을 들고 무작정 백화점으로 가서 생애 처음 산 자수 풍경화 1점, 1973년 어느 일요일 불쑥 찾아온 화가 친구의 한 마디에 20만 원을 가불해 작품 3점을 샀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유난히 조선의 예술을 좋아하는 이 씨는 2장을 '내가 사랑한 조선의 예술'이라며 정선, 김홍도, 이인상, 최북, 장승업 등 조선의 화가들과 도자기 이야기로 채워넣었다.

미술에 대한 진지한 열정으로 이 씨는 김홍도의 '표의풍류도'를 소장하게 됐다. 조선시대 백자 수집가로 유명한 박병래 선생의 미망인이 차를 마시던 중 "정말로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다."며 돈도 받지 않고 작품을 넘긴 것이다. 도자기에 관한 일화도 재미있다. 어스름 새벽에 문갑 위의 달항아리 자태가 몹시 장엄하고 황홀해 벌떡 일어나 큰절을 올린 이야기다.

다시 서양화가인 김환기와 이중섭의 이야기로, 20세기의 문사인 검여(劍如) 유희강, 청명(靑溟) 임창순, 여초(如初) 김응현, 미술사학자 이용희와 최순우, 조선미를 예찬한 외국인 이야기 등으로 옮겨간다. 그리고 이 씨의 설(說)은 문화유적으로까지 이어진다. 대우를 떠난 이후 다녀온 제주도, 해남, 부석사와 서산 마애불에 관한 답사기로 우리 땅의 아름다운 맛을 전해준다.

이 씨의 진솔한 삶과 생각, 미술에 대한 넘치는 사랑, 많은 예술가나 학자들과의 교류를 담은 자전적 독백은 유 청장의 말대로 "많은 분들의 미를 보는 눈을 틔워주는 길라잡이" 교양서적으로 부담이 없어보인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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