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경옥입니다] 포도

달력은 9월 중순에 와있는데 윤달로 인해 여태 음력 7월이다. 그래선지 아직 포도가 한창이다. 한 주 전의 白露(백로) 부터 앞으로 스무나믄날 남은 추석까지를 예전엔 '葡萄旬節(포도순절)'이라 불렀다. '포도의 계절'이란 의미. 이맘때 年滿(연만)하신 어르신들은 편지글 서두에 "葡萄旬節에 氣體候萬康(기체후만강) 하옵신지요?" 라는 식으로 고풍스러우면서도 격조있는 인사말을 나누곤 했다.

알알이 까맣게 영글은 포도송이는 보기만해도 기분을 상큼하게 만든다. 찌들리고 지친 마음에 여유로움을 안겨준다. 1970,80년대초만 해도 포도철이면 도시 근교 포도밭에는 계절의 낭만을 만끽하려는 도시인들이 적지 않았다. 원두막마다 삼삼오오 둘러앉아 소쿠리 가득한 포도를 모두들 이가 시금거릴때까지 먹었다. 투명해진 하늘빛과 뺨을 간질이는 미풍, 바람결에 너풀거리는 포도잎들, 얼마 안 남은 삶에 목이 쉬어버린 매미….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포도밭을 찾지 않고, 원두막도 사라져 갔다.

포도는 실상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색색깔 음식이 웰빙식으로 인기 높은 요즘, 검자줏빛 포도는 껍질의 안토시안 성분에 항산화·노화방지 등의 기능이 있어 젊음 유지 효과가 크다 한다. 씨앗 또한 노화방지에 항암효과까지 탁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이어트와 미용에 좋다면야 하늘의 별도 따려들판에 껍질과 씨앗쯤 씹는 일이야 대수롭잖을 듯 하다.

오동통한 알맹이들이 탐스럽게 매달린 모양새는 多産(다산)의 상징이 될만하다. 그러기에 옛날엔 첫 포도를 딸 때 사당에 먼저 고한 뒤 맏며느리가 맨 먼저 한 송이를 통째로 먹었다 한다. 포도알 처럼 많은 자식을 두기 바라는 염원이 배어있는 풍습이다.

이런 맥락에서 부모의 가없는 자식 사랑은 '葡萄之情(포도지정)'으로도 일컬어진다. 어린 자식에게 포도를 한 알 한 알 껍질 벗기고 씨를 빼낸뒤 먹여주던 육친의 살가운 정에서 비롯되었다.

광주에서 19살난 아들이 아버지를 마구 때려 숨지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아버지가 자신의 명의로 사채로 쓰려다 거절당한뒤 자신을 폭행하자 우발적으로 일을 저질렀다고 한다. 부모도 자식도 문제많은 시대, 天倫(천륜)이 상실돼 가는 시대다. 알알이 잘 익은 포도 송이를 보니 불현듯 '포도지정'이 낱말을 떠올리게 된다.

전경옥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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