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 꿈 나의 삶, 김연철] ⑧학교 경영의 쇄신

1964년 1월 겨울 방학 때 전임 학교인 영신중·고등학교에서 교감으로 초빙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사립에서 공립으로 옮긴 지가 얼마 되지 않은 처지여서 도 교육위원회 수학과 장학사님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는 의외로 "젊을 때 소신을 갖고 교감 경력을 쌓는 것도 좋다"고 하시면서 이동을 권한다. 이 학교는 내가 공립으로 오기 직전에 1년을 근무한 경력이 있어 학교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교원 조직은 좋은 편이 아니었고, 재단의 재정 형편도 넉넉하지 않았다. 특히 6~7년간 학생 모집에서 정원 미달로 학생과 교사의 사기마저 저하되어 있었다.

그래서 먼저 재단 측에 "교사의 자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인사권을 교감에게 일임하고, 학생들의 복지를 위해 학생회비, 실험·실습비는 교감의 결재가 난 후 집행한다."는 부임 조건을 제시하였더니 재단 측에서 쾌히 동의해 주었다. 나도 먼저 청렴(靑), 근면(勤), 검소(儉)를 생활 신조로 삼고 혁명을 일으킨다는 각오로 학교를 재건해 보겠다고 다짐했다.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을 선생님들에게 충분히 이해시켜 놓고, 그분들의 의식구조를 180도 전환시키기로 했다. 이러한 방침을 전 선생님에게 알리고 앞으로 추진할 계획을 구체적으로 발표했다.

먼저 교사 채용은 그 대상자를 '경북사대 졸업자, 서울대학교 졸업자, 연세대학교와 고려대학교는 지정한 몇 개 학과 졸업생에 한한다.'로 하고 다음은 교사들이 "교육의 질 개선을 위해 매주 화요일은 연구 수업을, 금요일은 교내 연수를 결손 없이 철저히 시행하며, 마지막으로 학급 담임 교사는 학생 생활지도의 핵심이 되는 결석생 예방에 전력을 다한다. 만약 결석생이 있을 경우는 결석 사유를 교감에게 제출하고 지도 조언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학교를 운영한 결과 단기간에 그 성과가 눈에 띄게 나타났다. 이것을 본 여러 사립학교가 교사 채용 방법을 본교처럼 바꾸기도 했다.

당시 경북의 대학 예비고사 성적은 저조한 편이어서 교육감님은 학력 향상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모든 학교가 학력을 높여야겠다는 분위기에서 우리 학교와 어느 여자고등학교가 '72학년도 학력 우수 학교'로 교육감 표창을 받았다.

당시 몇몇 명문학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학교가 학생 모집에 온 힘을 쏟아야 했다. 나는 학생 모집에서도 획기적 변화를 일으켰다. 우선 지명도가 높은 선생님들을 선발해 중학교는 학교 인근 초등학교에, 고등학교는 단설 중학교에 배정하고, 책임제로 활동하게 한 결과 해당 학교 담임교사들이 그 정성에 감동하여 성적이 좋은 학생까지 지원하도록 해 주었다. 평소 정원을 채우기에도 급급하던 우리 학교가 중학교는 2.4 대 1, 고등학교는 2.1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교장선생님이 눈물까지 흘리면서 기뻐하시고, 전 선생님들은 "영신 만세"를 불렀다. 나는 이 날을 지금도 기억한다. 1964년 11월 23이다. 부임한 지 8개월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교원 조직에 있어서도 크게 성공하여 1970년 교육위원회에서 실시한 도내 고등학교 '교원조직진단평가'에서 영신고등학교가 최상위를 차지했던 것이다. 이것이 학교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김연철 전 대구광역시 교육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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