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가을 이야기

아침에 집을 나서며 무심코 쳐다본 아파트 주차장 옆 정원에 매달린 감이 물들어가고 있다. 작은 놀라움으로 주위를 유심히 살폈다. 그 옆엔 방울토마토만한 꽃사과도 올망졸망 열렸다. 돌배나무도 진화가 덜 된 듯한 열매를 수줍게 매달고 있다. 순간, 도심 아파트에 살아오면서 주변에 무심했던 게 이들 앞에 갑자기 부끄럽다. 그저 봄이 오면 여기저기 화사한 꽃나무가 만발하고, 그 꽃들이 지고 난 자리엔 나뭇잎들이 무성하게 열리면서 푸른색이 짙어지는 줄만 알았다. 그러다가 한 철 가고나면 '그 빛' 바래고, 곧바로 앙상한 겨울나무가 되는 '도시의 사계'를 나는 이렇듯 막 살아온 것이다.

학교를 졸업한 뒤 곧바로 시골로 들어가서 농사를 짓고 있는 친구한테서 엽서가 왔다. 편하게 보낼 수 있는 이메일보다 흙 묻은 손으로 펜을 잡고 끌쩍거리는 게 재미있다면서 가끔씩 '시골이야기'를 보내주는 친구다. 엽서의 머리는 이렇게 시작했다. "요즘 새삼스레 느끼는데, 농사는 일 그대로가 '기도'야. 이른 봄 언 땅이 풀리면 들판가득 솔솔 피어오르는 흙냄새를 맡으면서 씨를 뿌리는 농부의 그 맘을 상상하겠니? 여름날 이글거리는 태양아래서 구슬땀 쏟으며 이뤄지는 이런저런 뒷바라지 또한 보통일이 아니지. 그리고 요즘처럼 수확의 계절이면 나는 밤마다 몇 번씩이나 잠을 설친단다. 오늘 낮엔 참깨를 거뒀다. 점심 먹고 찾아 나선 깨밭은 온통 진한 갈색물결이다. 가까이 다가가서 조심스레 들여다보니 하늘 향해 벌린 가슴(?)속에 저마다 깨알을 소복소복 담고 있다. 이 모양을 처음 보는 듯 갑자기 콧등이 시큰하다. 이들이 오늘을 위해 비바람 이겨가며 버텨온 보람의 소중한 결실이리라. 숙연한 마음으로 두 손 모았다… " '시골의 사계'는 이렇게 깊어가고 있다.

손에 흙이라곤 묻히지 않고 살아온 도시인이 시골살이를 하면서 '기도'같은 가을을 거두고 있고, 과일나무들은 도저히 뿌리를 내리지 못할 것 같았던 도심 아파트 작은 뜰에 가을이 매달려있다. 괜한 욕심(?)이 일었다. 대구거리에 새로 심는 가로수 가운데 감나무도 심고 사과나무도 심어보면 어떨까. 뿐만 아니라 달구벌대로 중앙분리대 화단에 자주 심는 꽃배추 대신, 땅이 얼기 전에 보리를 뿌리면 어떨까. 아마도 4월 보리이삭이 맺힐 무렵부터 초여름 누렇게 팰 때까지 도심을 달리는 차량들은 보리밭 사이 길로 달리는 기분이 색다를 것이다. 이 곡식들은 도시에 살면서 배고픈 야생 조류의 먹이도 되고….

사람도 자연도, 모두들 결실의 계절을 맞고 있다.

이현경 밝은사람들-홍보실닷컴 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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