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3대도시의 하나였던 대구의 성세(盛勢)는 근년에 들어 4대도시 축에도 못들 정도로 형편없이 오그라들었다. 하지만 대구는 6.25 동란초기 한때 대한민국의 임시수도에 이어, 3년간 전국 2대도시가 될 정도로 당당했다. 50년 7월16일 대전에서 황급히 피난해 온 정부는 영남의 내륙웅도인 대구를 임시수도로 삼아 33일간에 걸쳐 건곤일척의 반격작전을 시도했다. 졸지에 임시수도가 된 대구의 모습은 어땠을까.
대구로 피신해온 이승만대통령은 동인동 현 국채보상공원 서북쪽에 있던 경북지사관사를 임시 관저 겸 집무실로 삼았다. 함께 온 신성모국무총리서리 겸 국방장관은 현 한은대구지점 자리인 국방부 임시청사에서, 조병옥내무부장관은 도지사실을, 지사와 내무차관은 도내무국장실을 각각 집무실로 썼다. 현 한일시네마 자리인 '문화극장'은 국회의사당으로 쓰였다.
임시수도가 된 이튿날 국방부정훈국장 이선근(李瑄根. 뒷날 문교장관)대령의 긴급담화가 신문에 실리면서 전황의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현대전은 국민총력전이다. 전국(戰局)을 수수방관하거나, 국외탈출기도자는 엄벌됨을 맹성하라"는 요지였는데, 주로 부유층을 겨냥한 경고였다. 20일부터 전쟁 직전에 발행했던 천원 권과 백원 권의 새 화폐가 통용되기 시작하자, 난리 통에 웬 새 돈 교환이냐는 시민들의 떨떠름한 반응이 앞섰다.
이어 21일 오전에는 계성중학교 교정에서 관주도형의 '국민총궐기대회'를 열고, "총역량집결로 멸공전진하자"고 결의했다. 전란 32일째인 7월27일엔 임시의사당인 문화극장에서 제 8회 임시국회가 열렸다. 참석의원은 모두 130명이었다. 전체 210명의 의원 중 약 38%인 80명 의원들의 생사가 묘연한 가운데 열린 비분에 찬 회의였다. 목이 메인 신익희(申翼熙)의장은 "이럴수록 국민의 여망에 부응하여 선량의 책무를 다 하자"고 호소했다.
대구시내의 각급학교 교실은 거의 후방보급부대와 임시육군병원 차지가 되었다. 길 가던 청년들은 강제 징집되기 시작했고, 중학상급생 이상은 학도병에 지원하기도 했다. 전선이 낙동강까지 이른 8월7일에는 대구방위사령관 명의로, "대구시민도 피란을 가야한다"는 유언비어에 속지 말 것과, 통금(밤9시-아침6시)위반자는 즉석에서 사살할 것이며, 도로 아닌 산길로 다니는 행위는 스파이로 오인되므로 엄금한다는 서슬 퍼런 경고가 나왔다.
그럼에도 "대구도 위험하다"는 소문이 계속 번지자, 조병옥내무장관이 "절대 천도는 없다"는 긴급담화를 내기에 이르렀고, 미국 펜타곤(국방성)에서도 외신을 통해 "대구수호만은 확실하다."는 성명을 내는 판국이었다. 때문에 8월15일 임시의사당에서 열린 광복5주년기념행사는 시종 비통한 분위기였다. 이대통령의 경축사는 공허하게 들렸고, "하늘은 돕는 자를 돕는다."는 신국회의장의 치사 역시 맥이 빠져 있었다.
이런 가운데 정부가 다시 봇짐을 싸기 하루 전인 8월16일, 느닷없는 이대통령의 특별담화 하나가 대구시민들을 황당하게 했다. 이대통령의 담화는 "대구뿐만 아니라 거리 곳곳에 넘쳐나는 인분으로, 파리와 구더기가 들끓고, 냄새 또한 진동하니, 국민위생은 물론 외국인들이 보고 뭐라고 욕하겠는가."하는 개탄의 내용이었다. 말인즉 옳은 말이었다. 그러나 대통령 자신을 포함한 집권층의 무비유환이 빚은 전란으로 민초들의 생명과 재산이 시시각각 요절나고 있는 판에 무슨 한가한 청결문제냐, 하는 것이 바닥민심이었다. 대통령의 때 아닌 특별담화에 움찔한 조경북지사는 "가로변에서 소변을 누거나, 대로상에 분뇨통을 방치하는 행위는 민족의 명예를 위해서도 즉각 금지하라."며, 거창한 민족명예론까지 들먹이며 즉각적인 맞장구지시를 예하기관에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가한 담화를 던져놓은 다음날로 대통령은 부산피란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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