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고백하건데, 문단의 주민등록부에 이름 석자를 얹은 후 이제까지 청탁받은 원고의 대부분은 가까운 이웃들의 인사말 나부랭이였습니다. 마을 조기축구회장인 선배가 잔뜩 폼을 잡고 읽을 '추계한마음축구대회'의 대회사를 비롯해, 친구 모친의 회갑잔치 기념 타월에 새길 짧은 말, 세상에 내놓지 않아도 좋을 듯한 개인 문집의 머리말, 술자리에서 명함을 나눈 어느 화가의 개인전 팸플릿에 새길 인사말 등등등…. 언젠가는 아파트 위층에 사는 아주머니가 찾아와 전교어린이회장 선거에 나서는, 초등학교 6학년 아들 녀석의 소견발표문을 써달라고 정중히 부탁을 하는데 정말 기가 꽉꽉 막혔었지요.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를 매우 어려워하거나, 스스로 글을 쓰려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글쓰기라면 아예 두 손 두 발 다 들어 항복해 버리고 남의 생각을, 남의 입을, 남의 볼펜을 빌리려는 사람이 이외로 많습니다.
글자를 모르면 문맹(文盲)이요, 글을 읽어도 그 뜻을 알아내지 못하면 준문맹(準文盲)이요, 책 읽는 능력은 있으되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을 책맹(冊盲)이라 한다면, 글쓰기를 못하거나 쓸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쓰기맹(作文盲)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요. 책맹이 일용할 양식을 쌓아두고 단식투쟁하는 분들이라면, 쓰기맹은 의사소통의 고속도로 입구에서 스스로 친 철조망에 갇혀 쌩쌩 달리는 자동차들을 바라보며 매연만 마시는 분들이지요.
그리고 쓰기맹연대의 회원일수록 글이라면 우선 문학을 떠올리는 경향이 짙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종류의 글쓰기이든 모두 문학적인 글쓰기로 인식합니다. 정보를 정확히 전달하려는 글이든, 친교를 위한 글이든, 심지어 설득을 위한 글에서까지도 문학적인 표현을 비빔밥에 나물 한 가지 더 놓듯 섞어 표현하려고 합니다. 다음의 글을 읽고, 도대체 누가 어떤 목적으로 쓴 글인가 알아 맞춰 보십시오.
"태풍 「나비」의 지친 숨결에/긴 여름 약속 없이 돌아가고/풍성한 가을 준비하고 있습니다.//지나버린 흔적을 새벽 꿈 같이 떠올리며/한 여름 내내 땀 흘려 다듬어진/샛별의 달라진 모습과/이른 봄부터 오늘까지 가꾸어 온/우리 아이들의 활동 모습을/가을 첫 자락에 운동회로 새기고자 합니다./가족과 함께 두 손바닥 열정으로 마주쳐 소리 내며/신바람 나는 하루를 지내시길 바랍니다."
이 아리송송한 글을, 샛별학교에서 학부모에게 보낸 '운동회 안내문'으로 읽어 냈다면 당신은 참으로 훌륭한 독자이십니다.
김동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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