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논단] 가을 단상(斷想)

폭풍 '산산'이 마지막 몸부림인 듯 한반도를 할퀴며 지나갔다. 그 비바람에 상처받은 나무처럼 우리 사회는 지금 몸살을 앓고 있다. 그것은 두 말할 것 없이 국내외 정치적 불안이 원인일 것이다. 올바른 과정과 길을 선택하지 않고 편법도 마다하지 않는 정치 행태가 법의 이치를 거슬리어 발생한 문제다. '法(법)'이라는 한자를 풀어보면 '물이 흘러가는 대로', 즉 '順理(순리)를 따르는 것'이다. 순리가 무시되는 사회는 항상 불안 요소를 안게 된다. 황금빛으로 넘실대는 가을 들판처럼 우리는 풍요롭고 편안할 수는 없는 것일까? 아마 가을이 주는 가르침에 그 해법이 있을 것이다. 조, 벼, 수수 등은 폭풍우 속 고통을 견디어 결실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고개 숙여 겸손해한다. 머리 흰 노모의 허리처럼 휘어진 갈대도, 암벽을 붉게 물들인 담쟁이 넝쿨도, 하얀 왕소금 뿌려 놓은 듯 청결한 메밀꽃도, 겸허히 옷을 벗어 동면을 준비하기에 차라리 아름답다.

四季(사계)의 질서는 자연이라는 길이다. 길은 사람의 마음을 열고 미래를 설계하는 청사진과 같다. 길을 얘기하자면 산사로 가는 길을 빠뜨릴 수 없다. 가을이면 절에 가는 길목엔 솔숲과 굴참나무, 군데군데 무리 지어 피어 있는 들꽃 등이 먼저 마중을 나온다. 그 숲길을 걸으면 世事(세사)의 번잡함을 잠시 접고 인생의 여유를 갖게 된다. 그래서 가을에 걷는 숲길은 느림의 미학을 느끼게 한다. 길은 공간이 되고, 다시 공간은 시간의 일기장이 된다. 그 일기장에 훗날 부끄럽지 않을 마음의 글을 쓰자.

마음의 문을 닫지 말고 항상 열어두어야 한다. 흐르는 냇물이 썩지 않듯이 날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언제나 활기에 넘치고 열정으로 빛이 난다. 냇물 닮은 맑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항상 가을처럼 겸허하며 아름답기에, 결코 아는 자가 되기보다는 언제까지나 배우는 자가 될 것이다. 물론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 항상 똑같을 수 없기에 불만이나 고민도 따를 것이다. 고민은 어떤 일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생기기보다는 일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데서 더 많이 생긴다. 마음의 밀물과 썰물을 느껴보라. 밀물의 때가 있으면 썰물의 시간이 있기 마련이다. 어차피 삶이란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행운과 고난의 반복인 것이다.

채근담(採根譚)에는 현실의 우리 길목에 이정표가 될 만한 말씀이 있다.

'처세불필요공 (處世不必邀功) 무과변시공 (無過便是功)

여인불구감덕 (與人不求感德) 무원변시덕 (無怨便是德)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언제나 성공만 따르기를 바라지 말라.

일을 그르치지 않으면 그것이 곧 성공인 것이다.

남에게 줄 때 상대방이 그 은덕에 감동하기를 바라지 말라.

상대방이 원망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은덕인 것이다.'

베풂에 인색하면서 내게 많은 이익을 바라는 것은 대립의 이해관계로 직결되어 오늘날과 같은 정치 사회적 혼란을 야기한다. 이 모두가 욕심이 원인인 것이다. 지붕 잇기를 성글게 하면 비가 곧 새는 것처럼 늘 마음을 조심해 가지지 않으면 이런 탐욕이 먼저 뚫고 나와 불행을 초래한다.

누군가를 잘못 만나 사업 또는 인생을 실패하게 되었다는 원망 섞인 얘기를 흔히 듣게 된다. 바꿔 생각해보면 무엇엔가 성공한 사람은 좋은 사람들을 만나 유익함을 얻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유유상종(類類相從)에 비교할 바는 아니겠으나 훌륭한 사람 곁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사람을 잘못 만나 그 무엇에 실패했다면 그 자신의 모습은 또한 어떠했는지 거울을 비춰보듯 되돌아 봐야하지 않을까?

인간의 최대 관심사는 인간 자신의 삶에 관한 문제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무엇을 바라며, 무엇을 찾으며, 무엇을 즐기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자신의 생활을 보람 있게,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 끊임없이 묻게 되는 이 질문에 명쾌한 불가(佛家)의 말씀이 있다.

'약문전생사(若問前生事) 금생수자시(今生受者是)

약문후세사(若問後世事) 금생주자시(今生做者是)

네 과거를 알고 싶으냐? 지금 겪은 그것이다.

네 미래를 알고 싶으냐? 지금 행하는 그것이다.'

지거 조계종 보현의 집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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