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다 가쓰히로(黑田勝弘·65) 산케이신문 서울 지국장을 만났다. 한국인들에게 산케이는 일본의 극우 신문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구로다 지국장은 일본극우의 대변자라는 평가를 종종 받는다. 기자가 서울 정동 그의 사무실에 도착한 것은 약속시간 20분 전, 그가 사무실로 들어온 것은 약속시간 10분 전이었다. 2주쯤 전에 약속했고, 전날 확인까지 했던 터였다. 기자가 인사했지만 그는 "아직 10분 남았으니까요."라며 안쪽의 자기 자리로 갔다. 그리고 무례하게도(내 입장에서 볼때) 태연히 자기 일을 했다. 전화를 걸고, 서류를 정리하고, 여직원에게 복사를 부탁하고…. 10분 동안 기자는 인상을 오만상 찌푸리며 스포츠 신문을 뒤적거렸다. 10분 후에 우리는 마치 이제 만난 사람처럼 웃는 낯으로 인사하고 명함을 주고받았다.
-전문-
교토 통신 서울 특파원,
무뚝뚝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구로다 가쓰히로 씨는 솔직하고 다감했다. 한국말은 거의 완벽했다. 한국에 온지 25년 됐다고 했다. 그는 "매일신문 알고 있어요. 계산 성당 옆에 있지 않나요?"라고 했다. 구로다는 1964년 교토통신(共同通信)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으며, 도쿄서 1년 견습 후 발령 받은 첫 근무지가 대구의 자매도시인 히로시마였다고 했다. 교토통신에서 22년, 산케이신문에서 17년 근무했다. 1978년 연세대 한국학당으로 유학, 한국어를 배웠다. 교토통신 서울 특파원 시절, 산케이신문으로 자리를 옮겼다. 가족은 일본 도쿄에 살고 자신은 서울의 오피스텔에 산다. 한 달에 한번 일본에 들러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고, 대학에서 특강도 한다. 주제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와 언론학.
◇ "선입견 갖고 나쁘게 몰아가"
구로다 지국장이 국내에 최근 오르내린 일은 2005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과 관련한 칼럼 때문이었다. 산케이신문에 게재된 칼럼의 요지는 '드라마는 고뇌하는 이순신을 부각해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일본인을 우스꽝스럽게 그렸다. 당시 히데요시의 출병거점은 사가현의 나고야(지금의 큐슈 나가사키 근처)였는데, 아이치현의 나고야(혼슈 중부)가 자료 지도로 등장한다. 또 히데요시의 병풍에는 그가 살았던 시대보다 훨씬 뒤에 등장하는 에도시대(1603년∼1867년) 풍속화가 등장하는 등 역사고증을 제대로 않고 사극을 만들었다.'였다. 물론 이 외에도 몇 가지 내용이 더 있었다.
구로다씨는 "내 칼럼이나 말과 관련해 한국 언론이 악의적으로 써버리는 경우가 있다. 당시의 칼럼 역시 유머스럽게 쓴 것인데, 한국 언론은 내가 마치 이순신 장군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처럼 묘사했다."라고 했다.
"이순신 장군은 일본에서도 예부터 높이 평가받고 있다. (한국에서 이순신 장군이 부각된 것은 박정희 정권 때부터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메이지 시대(1868∼1912년) 해전사에서부터 이순신 장군을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었다."
◇ "역사 잘 모르는 사람 많아"
기자가 질문했다. "일본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관계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듯 하다. 내가 아는 일본 대학생들은 임진왜란은 물론이고 일제침략에 대해서도 모르더라. 왜 가르치지 않나?"
구로다 지국장이 답했다. "일본도 역사를 가르친다. 그러나 지식의 정도는 개인차가 크다. 일본 젊은이들 중에는 일본과 미국이 태평양전쟁을 치렀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있다. '일본이 미국과 싸웠다고요? 그래서 누가 이겼어요?'라고 묻는 젊은이도 있다. 물론 한국에서 일본에 대해 가르치는만큼 일본은 한국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 일본이 한국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하려면 한국이 더 커지면 된다. 역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구로다 지국장은 근래에 한·일 양국에 등장한 민족주의에 대해 '냉전의 종식'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공산주의라는 거대한 적이 있을 때 한국과 일본, 미국은 단결했다. 그러나 공산주의 붕괴 후 한국은 미국에 대해, 일본은 한국에 대해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불만은 이전에도 존재했다. 다만 거대한 적(공산주의) 앞에서는 불만을 드러내기보다 참았다. 그러나 요즘 한국인은 미국에 대한 불만을 숨기지 않는다. 일본 사람들인들 한국에 대해 불만이 없었겠는가? 냉전시대에는 불만이 있어도 참았다. 공산주의에 맞서 한국이 최전방에서 일본을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 "일본을 너무 의식하지 않았으면"
한국에서는 산케이가 일본의 극우 언론으로 알려져 있다는 말에 그는 "산케이를 극우로 생각하는 국가는 한국밖에 없다."고 했다.
"산케이는 보수를 지향하고 있다. 1945년 패전 후 일본은 급속하게 좌경화됐다. 좌파가 언론을 완전히 지배했다. (그는 몇몇 유명한 일본 언론사를 좌파로 언급했다.) 그런 상황에서 보수언론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많은 사람들이 보수'우파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산케이를 도와주기도 했다. 산케이는 (당시에는 보기 드물게) 보수·우파를 자청해 오늘에 이르렀다." 그는 한국에서 산케이를 '극우'라고 생각하는 것은 산케이 계열사인 후소사의 교과서 문제 때문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구로다 씨는 한국사회가 1980년대를 지나면서 좌측으로 이동했다고 말했다. 한국의 위치 이동에 따라 보수로 평가받던 산케이가 극우로 평가받는 경향도 있다고 했다.
그는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다. 국민생활 수준도 아주 높다. 바깥에서 보면 강력한 국가다. 경제력뿐만 아니라 한류 바람도 거세다. 한국은 그만큼 강한 나라임에도 일본에 대해서만은 여유를 갖지 않는다. 아직도 한국은 스포츠든 정치든 일본을 적으로 삼아야 단결하고 힘을 낸다. 진정한 극일은 일본을 의식하지 않는 자신감이 아니겠나?"고 했다.
◇ "대학시절 좌파 분위기에 몰입"
그가 성장했던 오사카에는 재일교포들이 많았다. 학창시절 한 학급에 재일교포 학생이 5, 6명 씩은 있었다고 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일본은 전쟁물자 보급기지였고, 그는 고철을 주워 팔아 용돈으로 썼다. 그가 고물을 주워 파는 가게가 재일교포가 운영하는 고물상이었다. 그는 그때 한국 사람들을 많이 접촉했고, 분위기도 조금 파악했다.
그는 양국 사람의 기질적인 차이점에 대해 한국 사람은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일본인은 일단 상대의 입장을 듣는 편이라고 했다. 한국인은 "내 말을 들어봐."로 시작하고, 일본인은 자기 말 대신 상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는 것이다.
대학시절 그는 공부를 별로 안 했다고 했다. 1960년대 일본의 대학은 한국의 1980년대처럼 시끄러웠다. 당시 일본사회 분위기 전체가 좌파였고 그 역시 그랬다. 특히 경제학부가 그랬고, 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심취했다. 이른바 투쟁에 정신이 없었다.
"당시 우리가 받은 역사 교육은 진보적 좌파 교육이었다. 일본 역사에 대해 비판적으로 배웠고, 한반도 지배 문제, 중국과의 문제, 이런 거 다 비판적으로 배웠다. 그래서 민비(명성황후) 시해사건도, 일본의 낭인들이 일으킨 거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안중근 의사한테 저격당했다는 이야기를 학창시절 읽고 들었다."
그런 책을 읽으면서 그는 한국에 대해 미안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고 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인들은 한국을 어둡고 측은한 사회로 생각했다고 했다. 그런 그가 1971년 교도통신 기자시절 한국에 여행을 왔고, 한국의 밝은 분위기와 친절에 놀랐다고 했다.
◇ "일본과의 선린우호도 알려야"
구로다 씨는 한국의 언론과 교육, 어른들의 이야기는 일방적인 측면이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 일제시대를 비판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당연하지만, 한'일간의 우호협력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야기 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국교 정상화 이후 한'일 양국은 협력을 통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정부 차원은 물론이고 민간 차원에서도 협력이 많았다. 한·일 간에는 긍정적인 관계와 부정적인 관계가 공존했다. 그럼에도 한국의 선배 세대들은 나쁜 관계만 강조한다. 일본 사람들 중에는 일제지배에 대한 죄송함과 공산주의 방호막으로써 한국의 역할에 대한 감사로 손해를 감수하면서 한국을 지지한 사람들도 많았다. 이런 점은 한국에서도 인정해주어야 한다."
그는 일본의 지식인들은 한국의 미래 좌표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미래 한국이 (미국과 일본으로 대표되는) 해양세력으로 남을지,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대륙 세력화 할 것인지에 대해 촉각을 세우고 있다고 했다. (그는 매우 조심스럽게) 현재 한국정부를 좌파 정부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와 미래 한국의 좌표에 대해 말할 땐 우려 섞인 표정을 짓기도 했다. 구로다 지국장은 한·일양국의 관계에 대해 "마찰과 대립이 이어지겠지만 결국 (양국간 입장 변화가 아니라) 현실적인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겠느냐."라고 했다.
△구로다 가쓰히로(黑田勝弘)=산케이신문 서울 지국장 겸 논설위원. 서울 사쓰마회 회장. 일본 큐슈 가고시마현 사쓰마 출신이다. (부모의 오사카 거주로 출생지는 오사카). 교토(京都) 대학 경제학부 졸업했고 교토통신 서울 특파원을 지냈다. 한국 관련 책을 20권 가까이 썼으며, 그 중 5권이 한국에서 출판됐다. '구로다 기자가, 한국을 먹는다'는 그의 책은 요상한 제목과 달리 외국인이 먹어본 한국음식과 역사문화에 대한 에세이집이다. (2006년 9월 21일자 라이프매일)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