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여름 이야기

지난 여름 어느 날. 산골 암자에 계시는 노스님을 뵈러갔다. 늘 풀잎처럼 정갈한 모습에다 눈빛이 깊은 스님이다. 평소 스님을 따르던 친구들과 몇 번이나 별렀다가 나선 길이라 모두들 들뜬 마음으로 차에 올랐다. 오랜만에 만나 밀린 얘기에다 이런 저런 수다까지 떨다보니 산 아래 마을까지 쉽게 왔다. 주차장에서 산길 따라 한 시간쯤, 짙은 숲 그늘로 걸었지만 암자에 도착하니 모두들 온몸이 땀에 젖었다. 법당에 참배를 마치고 요사채 넓은 방에 들어서니 구석자리에 선풍기 한 대가 서 있다. 평소 더위를 많이 타는 친구가 서둘러 그 선풍기를 덜렁 들어냈다. 말은 안 해도 친구들은 손부채질을 해가며 저마다 그 바람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플러그를 꽂고선 급한 마음에 몸통을 이리저리 드르륵거리며 돌렸다. 그때 스님께서 죽비를 내리치면서 "애기보살님들~ 선풍기 다치겠소…"라며 뜻밖의 선풍기 법문(?)이 시작됐다. "이 선풍기가 어찌 이곳 깊은 산속까지 오게 되었겠습니까. 오늘 오신 여러분처럼 여름 길 올라오신 분들 더울 때 사용하라면서 여러해 전 어느 신도님께서 짊어다 놓은 게지요. 그래서 이 선풍기는 이곳 암자를 찾는 모든 분들, 바로 여러분이 주인이지요. 때문에 조심스레 아껴가면서 소중하게 다뤄야 해요. 옮길 때는 두 손으로 받들 듯이 들고, 날개방향을 돌릴 때는 무리하지 않도록 풍향스위치를 사용하세요. 스위치나 손잡이에 땀 묻지 않게 하시고…" 갑자기 모두들 부끄러웠다. 평소 버릇대로 별 생각 없이 막 틀어놓은 선풍기가 우리들 앞에 '교훈'으로 서 있는 것이다.

그러고 생각하니, 이 방 들어올 때 댓돌위에 놓여있던 스님의 하얀 고무신 한 켤레. 얼마나 오래 신었는지 뒤꿈치 발목에 스쳐 닳은 자리가 비닐로 겹쳐 기워져 있었다. 고무신 깨끗하게 씻어 말린 뒤 비닐 오려서 겹쳐 덮어 바늘로 꿰매고 있을 스님의 모습을 상상해 봤다. '물자절약'이나 '검소'라는 사회적 표현만으로는 스님의 이 마음을 어찌 다 배울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숙연해졌다.

스님의 구형 휴대폰은 이색 옷을 입고 있었다. 투명 비닐을 덮어씌운 뒤 투명 접착테이프로 둘둘 감아놓았다. 얼른 보면 깨진 것을 싸놓은 것 같다. "이 휴대폰? 허허, 구형이면 어때 잘 터지는데. 애지중지 아껴 흠내지 않고 오래오래 소중하게 사용해야지요. 물, 공기, 나무, 흙 같은 우리주변 모든 사물과 자연도 마찬가지에요. 지금 흔하다고 함부로 하다간 나중에 우리 모두가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하게 되겠지요. 늘 듣는 얘기지만…"

청정 수행승을 모시고 산에서 여름 한나절을 보낸 뒤 내려온 우리는 지금, 찌든 도심에서 새 계절을 맞고 있다.

이현경 밝은사람들-홍보실닷컴 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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