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교단에서)고3의 이상과 현실

수지는, 눈동자가 포도알같이 깊고 웃음이 포도이파리처럼 싱그러운, 올해 고3인 내 제자다. 고향을 떠나 혼자 하숙을 해야 하는 고달픈 생활 속에서도, 또래의 누구나가 거쳐야만 하는 '질풍'의 벌판과 '노도'의 강을 슬기롭게 건너오는 한편, 영덕 앞 바다에서 갓 건져 올린 대게의 표정처럼 순박한 심성을 끝내 잃지 않은 아이다. 수지의 장래 희망은 경영학을 전공해서 '삶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전문경영인이 되거나, 교대(敎大)로 진학해서 초등학생들의 '초롱한 눈빛을 지켜주는' 선생님이 되는 것이다. 서로 엇갈리는 장래 희망 사이를 행복하게 고민하면서, 어느 해보다 무더웠던 지난 여름의 불볕더위를 착실하게 이겨내 오고 있었다. 수지는 그렇게 굳세고, 따뜻하고, 꿈 많은 아이다.

무더위가 극성이던 지난 8월 말이었다. 수지가 교무실로 찾아왔다. 내내 말이 없었고, 얼굴은 무거운 바위에 짓눌린 듯 일그러져 있었다. '무슨 일이냐'는 연이은 나의 물음에도 열릴 줄 모르던 수지의 입으로 낮고 가느다란 흐느낌이 비집고 나왔다. 그 흐느낌을 통해 자신의 '숨막힘'이 다소 뚫리기라도 하는 양 수지는 겨우 입을 열었다.

"다람쥐가 된 것 같아요. 똑같은 쳇바퀴 속에서, 벌써 3년째예요. 날마다 펼치는 교과서와 문제집 속의 활자들이, 낯선 외계어처럼 증발하고 있어요. 일상은 권태롭기만 하고, 꿈과 희망은 연기처럼 흐려지고 있어요."

요지는 그랬다. 이른바 '고3 병'이었다. 겨우 겨우 달래고 설득시켜서 본래 일상의 자리로 돌려보내긴 했지만, 뒷맛은 개운치 않았다. 주변인으로서의 청소년기는 높고 푸른 이상과 낮고 메마른 현실의 논리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자기 변증을 이루어나가는 시기이다. 그럼에도, 삶의 이쪽(현실)과 저쪽(이상)의 주변부를 거닐 수밖에 없는 청소년들에게 고민과 갈등이라는 자기 숙성의 시간을 충분히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시간을 갖는 아이들을 낙오자로 만들면서 입시라는 현실의 목표점을 향해서만 맹목적으로 질주해나가는 우리교육은 분명 어둡고 차갑다. '교육은 백년의 큰 설계이어야 한다'는 옛말은, 그래서 온전히 정당할 것이다.

한 사회의 미래와 이상을 짊어지고 실현시켜 나아갈 청소년들에게 현실과의 조화를 바탕으로 삶의 이상을 설계하고 다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 것은 그 차가운 시간 속을 살아야만 하는 청소년들에게도 가혹한 일이겠지만, 그 사회로서도 불행한 일일 것이다. 분명 '점진적 개선'이라는 전제가 따라야하겠지만, 어쩌면 오늘 우리의 교육환경조차도 더 큰 틀에서 본다면 청소년들이 자신의 굳건한 이상 설계와 실현을 위해 극복해야할 또 다른 현실일지도 모른다. 현실에 두 발을 딛고 꿈을 설계하는 자에게만 이상은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가을이다. 지난 여름 땡볕으로 타들어가던 학교 근처의 포도밭에는 따가운 가을 햇살이 포도송이들 위에 내리꽂히고 있다. 여린 포도껍질을 찢는 듯이 파고드는 저 가을 햇살은 포도의 고통을 끌어안고 포도알 속으로 스며들어 포도의 단맛을 잉태할 것이고, 끝내 포도주의 깊고 그윽한 향기로 숙성될 터이다.

수지의 가을이 끝내 삶의 그윽한 향기로 거듭나기를.

김상묵(포항제철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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