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러시아 연해주 노브싸노프카. 블라디보스톡에서 버스로 4시간 30분이나 달려 도착한 시골 마을. 고려인 후손 25세대가 모여 사는 이 곳에 오랜만에 생기가 넘쳤다. 오후 늦게야 마을 입구에 도착한 낡은 버스.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한국인들이 버스에서 내리자 주민들의 얼굴에 한껏 미소가 번졌다. 생면부지 낯선 얼굴들이 수십년 만에 만난 가족처럼 바뀌는 순간, 사람들은 손을 맞잡았다.
"그래, 이 먼 데까지 어떻게 왔대요. 그저 반갑고 고맙소."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어디 편찮으신 곳은 없으세요?"
이날 고려인 후손들과 만남은 대구에 기반을 둔 자원봉사 단체인 '우리 함께 운동본부' 소속 회원 16명이 연해주 고려인 마을을 찾으며 이뤄졌다. 오는 10월 13일 창립 총회를 갖는 '우리 함께'는 동북아시아에 살고 있는 해외 동포들을 돕고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와 결혼 이민지들의 한국 사회 적응을 지원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단체.
1937년 극동아시아에 살던 한인 19만여 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던 당시 오오냐(76·여) 할머니의 나이는 고작 일곱살이었다. 오 할머니의 조부(祖父)는 1890년대 함경도에서 건너가 연해주에 정착했다가 1937년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당했다. 당시 얘기를 꺼내자 오 할머니는 눈물부터 쏟았다. "지붕도 없는 가축용 화물열차에 실려 끝도 없이 끌려 갔어야. 지옥이나 다름없었지. 얼어죽거나 굶어죽는 사람이 태반이었다우."
지난 1992년 할머니는 남편과 함께 다시 연해주로 돌아왔다. 가진 것도 없고, 생활 기반도 없어 시골 마을 빈집에 터를 잡았다. 이 마을에 사는 고려인들은 모두 우즈베키스탄에서 이웃으로 살다 함께 이주해 온 사람들. 마을에는 상수도조차 없어 주민들은 정부로부터 물을 사서 녹슨 물탱크에 저장해 놓고 마신다.
김현일(85) 할아버지는 한국의 농촌마을처럼 이 곳에도 노인들만 마을에 남았다고 했다. "작은 아들은 일을 하러 서울로 떠나고 큰 아들은 모스크바에 살고 있어. 할아버지 고향이 함경북도 북청이었디." 단 한번도 가본 적 없는 고향. 하지만 이들의 꿈은 한번이라도 고국 땅을 밟아보는 것이다.
"한국 구경 해보는게 소원이지. 이제 살면 얼마나 더 살겠어. 그 전에 구경한번 해봤으면 원이 없겠수." 이날 저녁 상에는 북한식 만두와 우즈베키스탄 식 볶음밥, 러시아식 닭요리가 함께 차려졌다. 이들의 식탁에도 지난한 세월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한 채 이곳 저곳을 유랑한 고려인의 아픔이 스며있던 것.
'우리함께' 회원들은 마을에 상수도 시설을 갖출 수 있도록 3천 달러 규모의 재정 지원을 하기로 했다. 또한 목욕용품 세트와 파카, 조끼 등을 선물로 내놨다.
이 단체 위현복 사무총장은 "정부나 다른 NGO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직접 찾아가 봉사와 나눔을 실천할 계획"이라며 "이를 위해 연해주에 거주하는 고려인 후손들의 한국 방문과 지역 대학 한국어학과에 한국인 교수를 파견할 수 있는 방안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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