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경옥입니다] 미운 정 때문에

미국서 살다 잠시 귀국한 지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전 기자, 미국은 파라다이스야. 하루하루가 즐거워." 한동안 깊은 슬픔에 빠졌었던 그녀였기에 통통 튀는 목소리가 반갑다. 그런데 한국에 오니 금방 갑갑해진다는 그녀. "낙원에서 사시니 좋겠어요" 짐짓 볼멘 소리로 말했더니 "아니야, 말이 낙원이지 뭐"라고 한다. 말꼬리에 쓸쓸함이 묻어난다고 느낀건 선입견 탓일까.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해외 유학·이민박람회가 밀려든 사람들로 어지간히 북적댔던 모양이다. 매스컴마다 '한국 탈출 러시'라며 목청을 돋운다. 유학이나 연수차 해외에 나가 90일 이상 장기 체류한 사람이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10만명을 넘어섰다 한다. 미국 영주권을 받은 사람도 작년에 2만5천여 명으로 사상 최고이며, 그중 취업 이민은 전년의 2배나 많아졌다한다.

청소년들은 교육 때문에,중장년은 취업이나 자녀 교육문제 때문에, 또 은퇴자들은 하인을 두고 골프를 즐길 수 있는 노후의 낙원을 찾아 저마다 떠나려 한다.

사람 가슴을 옥죄는 이 나라,시끄럽고 어수선하며 여유라곤 없는 파삭한 이 사회가 넌더리난다는 거다. 좀 덜 벌어도, 이름없이 살더라도 조용히, 평화롭게 살고 싶다는거다.

그 심정이 십분 이해된다. 누군들 그런 생각 안해본 사람 있으랴. 에라, 하고 비행기 타버리고 싶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날이면 날마다 온갖 소란 속에서 복닥거려야 하는 이 땅의 辛酸(신산)함과 달리 세련되고 안정된 그런 나라에서의 삶은 얼마나 쿨(cool)할 것인가.

그런데, 다른 이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필자 경우엔 한가지 때문에라도 못 떠난다. 다름아닌 鄕愁病(향수병). 비행기를 제집 안방마냥 들락거리는 '제트(jet)족', 오늘은 이 나라,내일은 저 나라로 옮겨가는 新(신) 遊牧民(유목민)이 급증하는 이 시대에 촌스럽게도 향수병이라니….

'歸去來辭'(귀거래사)의 시인 陶淵明(365?~427)이 작은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한 직후 쓴 것으로 보이는 시 '歸園田居(귀원전거)'에는 귀향의 심정을 이리 읊고 있다. "…조롱의 새는 옛날의 숲을 그리워한다(羈鳥戀舊林). 연못의 고기도 이전의 늪을 생각한다(池魚思故淵)…." 張德祚(1914~2003)의 소설 제목 '多情도 병이런가'(1946)가 오늘따라 더 가슴에 와닿는건 그놈의 정이 고운 정만은 아닌 탓이다.

전경옥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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