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급성 골수성 백혈병 앓는 간호사 정현경 씨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아멘." 주기도문을 외우며 고통을 참으려 하지만 악다문 입 밖으로 비명소리가 새어나온다. 특히 골수검사를 위해 척추에 구멍을 낼 때마다 밀려오는 통증은 견디기 힘들다. 골수를 채취하고 나면 녹초가 된다. 피곤함에 눈이 감긴다.

정현경(24·여·동구 효목동) 씨의 하루는 그렇게 또 지나간다. 지난 달 초만 해도 현경 씨가 입고 있던 옷은 환자복이 아니라 간호사복이었다. 그가 앓고 있는 병은 급성 골수성 백혈병. 환자를 보살피던 '정현경 간호사'는 면역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탓에 무균실 신세를 지는 '정현경 환자'가 됐다. 고통스런 골수검사를 할 때마다 신경은 날카로워진다. 자신도 모르게 옆을 지키는 언니 희수(26) 씨에게 짜증도 부리게 된다. 속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옆에 있어줘서 정말 든든하고 고마운데도....

현경 씨가 병원에 입원한지 한달이 다 돼가지만 희수 씨는 아직도 환자복을 입고 있는 동생의 모습이 낯설다. 몇 달 전부터 몸 군데군데 퍼렇게 멍이 들고 피곤하다고 했지만 상황이 그리 심각할 줄은 가족 누구도 짐작치 못했다. "지난 달 말엔 제대로 움직이기조차 힘들어해 현경이가 근무하는 병원에서 피검사를 받았습니다. 대뜸 의사 선생님이 그러시데요. '이 정도면 상당히 아팠을 텐데 어떻게 참고 견뎠냐.'고요."

물어보지 않아도 동생이 왜 그리 악착같이 버텼는지 희수 씨는 안다. 빚더미에 신음하는 집안 형편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을 터. 외환위기 무렵, 아버지(57)가 보증을 잘못 선 탓에 고스란히 떠안게 된 빚은 가족의 어깨를 짓눌렀다. 몸이 약해 요양이 필요했던 아버지는 가만히 누워 있을 순 없다며 택시운전대를 잡았고 어머니(48)는 막노동판을 전전했다. 하지만 보증 빚을 갚으려고 빌린 사채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 갚을 돈만 7천만 원에 이르렀고 집도 근저당으로 묶였다.

"빚은 많았지만 모두 악착같이 벌면 미래는 보일 거라고 생각했죠. 형편이 어려운 탓에 대학에 가자마자 군대에 갔던 막내 남동생(22)도 제대 후 아르바이트를 했고 저도 시내 한 병원 직원으로 일하며 사채 이자와 원금을 갚아나갔습니다. 그래도 가장 큰 짐은 현경이가 졌어요. 그래서 억지로 참다 쓰러진 동생이 더욱 안쓰러워요."

몸이 약한 아버지는 현경 씨가 쓰러진 뒤 더욱 기운이 빠졌고 어지럼증도 심해졌다. 그런데도 운전대를 잡겠다고 고집을 부려 가족들이 억지로 뜯어말렸다. 대신 아버지는 집안 살림을 하며 현경 씨의 옷가지를 일일이 삶아 병원에 가져다준다. 병간호는 이미 결혼해 임신한 몸인 희수 씨의 몫. 어머니와 남동생은 돈을 벌지만 한달 수입은 150만 원이 채 안된다. 800만 원에 달한 병원비는 고사하고 빚을 갚으며 생계를 잇기에도 빠듯한 액수다.

현경 씨는 현재 1차 항암치료를 마쳤고 경과도 괜찮은 편. 그러나 2, 3차 항암치료와 골수이식수술이 필요하다는 것이 의료진의 판단이다. 가족들은 담당의사만 보면 괜찮아지겠냐고 물으며 매달린다. 좋아질 것이라는 말이 듣고 싶어서다. 의사가 해줄 말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기 싫어 끈질기게 묻고 또 묻는다.

"언니라고 큰소리만 쳤지 제대로 해준 것 하나 없는 지난날이 후회됩니다. 아프면 내게라도 살짝 알려줄 일이지 그렇게 아픈 데 혼자서만 끙끙 앓다니 바보같은 아이에요. 정말 시간을 한 달 전으로 되돌릴 방법은 없는 걸까요?"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저희 '이웃사랑' 제작팀 계좌번호는 대구은행 069-05-024143-008 ㈜매일신문입니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