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하늘은 높고 맑고 푸르다. 시골길에 피어 있는 코스모스는 이 지상의 미의 대표인 양 하다.
내가 고교생 때 첫사랑을 느낀 소녀 K는 꼭 코스모스였다. 아름답기가 꼭 가을 하늘이었다.
너무나 아름다웠던 소녀 K여 이제는 행복을 빌겠다. 가을 하늘같이 가을 하늘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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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천상병의 시처럼 코스모스는 눈이 시리도록 파란 가을 하늘에 딱 어울린다. '소녀의 순정'이란 꽃말도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런 코스모스가 감나무로 가득한 마을 입구에서 환하게 웃는다. 체험객들의 마음이 절로 흥에 겨워진다.
"저희 마을은 귀천봉, 억산, 운문산으로 둘러싸인 모습이 바가지같다고 해서 박곡이라고 부른답니다. 100여 호가 300년 전부터 대를 이어오고 있는데 물과 공기가 좋아 70대도 젊은 편에 들 정도로 장수마을입니다."
주민 김종환(52) 씨의 마을 소개에 이어 곧바로 감 염색체험이 시작된다. 시큼한 감 물 냄새가 썩 유쾌하지는 않지만 모두들 처음 해보는 체험에 열심이다. "대충대충 하지 말고 정성스레 주물러야 색깔이 잘 나온다."는 주민 정경숙(44·여) 씨의 설명에 권용길(36) 씨는 아예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자세를 잡는다. "그런데 이 걸 30분이나 해야 되요?"
염색한 손수건은 산들바람에 부탁하고 뒷산에 오른다. 땅바닥에는 밤이 지천으로 깔려있다. 밤송이에 찔리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벌에 쏘여도 즐겁기만 하다. 토실토실한 알밤이 마음까지 넉넉하게 한다.
긴 대나무 장대로 잘 익은 감을 따먹는 재미는 제법 쏠쏠하다. 고개는 아프지만 엄마아빠들은 아이들의 성화에 온 산을 헤집고 다닌다. "아빠, 감 다 익으면 또 와요. 네?"
미꾸라지잡기는 아이들 세상이다. 미꾸라지를 잡는 동안은 다시 여름이다. 미꾸라지를 잡는 건지 물놀이를 나온 건지..... 하긴 옷 버리는 것쯤이야 무에 대수랴!
고구마 밭에서는 호미 한 자루씩을 쥐고 열심히 '보물찾기'에 나선다. 꽤나 씨알이 굵다. 지난해 감자를 심은 밭인 까닭에 가끔 튀어나오는 감자는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여러분, 금줄은 왼쪽으로 꼰다는 것 아세요? 오른쪽으로 꼴 때보다 힘은 들지만 옆에 있는 다른 사람 생각도 해가며 여유있게 살라는 뜻이 담겨있지요."
저녁식사를 한 뒤 주민 김종생(44) 씨의 지도로 금줄 만들기가 이어진다. 병원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대부분인 요즘, 금줄 구경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소나무 가지와 숯, 고추를 꽂으니 제법 예쁘다. 잡귀 물리치는 금줄 만들며 모두들 소원을 빈다. '우리 집에 항상 좋은 일만 있게 해주세요'
정말 귀신이 있느냐며 겁에 질린 모습들이던 아이들은 농협 구미교육원 김민구 교수의 레크레이션 진행에 금세 웃음을 되찾는다. 가족끼리 부둥켜안은 채 "사랑합니다"를 속삭이는 표정들엔 행복이 충만하다. 숯불에서는 고구마가 맛있게 익어가고 막걸리 한 잔을 곁들인 노변정담(爐邊情談)은 밤새 이어진다. 처음 만난 전경희(36) 씨와 박윤신(36) 씨는 벌써 언니동생하며 붙어다닌다. "박곡리를 위하여!"
창가를 두드리는 아침 햇살에 눈을 뜬다. 전날 과음(?) 탓에 시원한 콩나물국이 반갑기 그지없다. 강영자, 신미옥 씨는 민박집 할머니로부터 선물받은 박에 입이 귀에 걸린다.
주민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버스는 마을 뒤 운문산 대비사로 향한다. 대웅전이 보물 제834호로 지정돼 있는 고요한 신라 고찰이다.
찾는 이가 적어 적막감마저 느껴지는 산사에 아이들 뛰노는 소리가 스님들을 노하게 했나보다. 비구니 스님이 나와 아이들을 꾸짖는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이들이다. 조용히 둘러보라는 말을 귓등으로 흘려듣고는 다시 뜀박질들이다. 하기야 스님들도 아이들 소리가 내심 반갑지않았을까?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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