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성지를 찾아서] 칠곡 동명면 한티순교성지

희안한 일이다. 비 온 뒤 한티 순교자 묘역에는 무지개가 뜬다. 이름없이 피어나고 스러져간 들꽃들처럼 박해를 피해 한티에 숨어살다가, 믿음의 피를 뿌린 무명 순교자 37 명이 묻혀 있는 이곳에 영원의 무지개가 뜬다.

한티의 무지개는 구원에 대한 상징이다. 세상살이는 끝났어도, 세월에 함몰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한티 순교성지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주는 메세지는 깨끗하고 단순한 믿음,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다. 속세의 잣대로 잴 줄 모르고, 성급하게 등돌리지 않고, 오직 순수하고 가난한 마음 하나로 안식을 찾아 오는 순례객들에게 천국의 희망을 심어주는 귀한 성지가 바로 한티이다.

◇ 어디선가 실려오는 향기

9월 순교자성월 막바지에 찾아간 한티는 너무 아름답다. 순례를 마친 신자들이 막 돌아가기 시작하는 오후 나절, 적막이 그 자락을 펴려고 할 즈음 한티 순교성지 제일 안쪽에 자리잡은 피정의 집 앞에 서 있노라면 마음이 서늘해진다. 아직 덜 피어서 은자주빛 물결로 일렁이는 억새의 바다 넘어 야외제대가 보이고, 그 너머로 정성들여 복원해놓은 옛 공소와 신자촌이 보인다. 사랑과 희생 밖에 모르던 착한 목자를 향해 기도하던 어린 양들이 다 돌아가고 난 뒤, 가을 하늘을 향해 열려있는 야외 돌제대 위로 어디선가 향기가 묻어온다. 한티 곳곳에서 보라색 말간 꽃을 피우고 있는 벌개미취 향인가? 아님 잔디와 함께 피어난 청명한 달개비나 수줍은 여뀌꽃내인가?

◇ 신앙 선조들의 행복한 시공간

어쩌면 들꽃 혹은 산벚나무에도 머무는 그분의 향기일까? 한티에 머물면 세파에 찌들려 울퉁불퉁하던 마음이 저절로 가라앉으며 순해진다. 바람을 따라 피정의 집에서 조금 내려가면 요즘 보기 힘든 자그마한 초가집들이 나온다. 바로 옛 공소이다. 수혈주거지 같은 움막도 있고, 단칸 집도 있다. 한티가 본격 성지로 개발되기 전까지 교우촌을 이루던 옛 공소는 세상에 재물을 쌓은 부자들의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 없지만, 신앙선조들에게는 지상낙원이었다. 천주교가 박해당하던 어두운 시절, 맘졸이며 살면서도 이웃과 함께 맘껏 기도를 올릴 수 있던 한티는 선조들의 행복한 시간이자 공간이었다. .

◇ 병인박해로 직전, 큰 교우촌 이뤄

한티에는 을해박해(1815년)와 정해박해(1827년)를 전후하여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물론 임란 때나 신유박해(1801년) 때도 신자들은 모여들었다. 신자들이 낮에는 사기를 구어 생계를 연명하거나 옥바라지를 했고, 밤에는 인근 원당마을이나 신나무골로 성사를 보러 다녔다. 밤새워 이 골짜기에서 저 골짜기로 옮겨다녔기에 "천주교 신자들은 축지법을 쓴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1862년에는 40여명이 성사를 받았다.(조선교구장 장 베르뇌 주교의 성무집행보고서). 한티에서 가장 먼저 순교한 교우는 이선이 엘리사벳과 아들 배 스테파노이다. 이들은 경신박해를 피해 신나무골에서 한티로 피난왔다가 이곳에서 순교했다. 지금 이선이 엘리사벳은 신나무골로 옮겨져 안장돼있다.

◇ 순교자들이 살고, 죽고, 묻힌 곳

한티에 묻힌 순교자로는 조 가를로와 그 가족, 그리고 서태순 베드로를 꼽을 수 있다. 조 가를로는 천주교를 박해하던 풍양 조씨인데 천주교를 믿는다고 심한 문중 박해를 받아 고향 상주 구두실이에서 쫓겨났다. 여러곳을 전전하다 한티로 들어온 조 가를로는 병인박해 때 아내(최 바르바라), 여동생(조 아기)과 함께 순교했다. 서태순 베드로는 증조부(서광수) 대부터 신자 집안이었다. 충주에 살다가 박해를 피해 형(서익순 요한)과 함께 강원도-문경새재-상주를 거쳐 장조카(서상돈 아우구스티노, 국채보상운동 창시자)가 살고 있는 대구로 왔으나 또다시 병인박해가 일자 문경 한실로 피난갔다. 서태순이 문경에서 잡혔고, 상주 진영에서 순교했는데, 서상돈과 함께 한티로 피난왔던 형 서익순이 시신을 거둬 한티에 안장했다.

◇ 도심 가까이 있는 마음의 안식처

먼저 죽이고, 나중에 보고하던 선참후계(先斬後啓)가 적용된 병인박해 기간 동안 한티 교우촌에서는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고, 마을은 불태워졌다. 박해를 모면한 조영학 토마(조 가를로의 아들), 박만수 요셉 등이 무명 순교자들의 유해를 수습하고, 공소 재건에 앞장섰다. 1967년 대구대교구 액션단체가 순례를 시작하면서 한티에 대한 관심은 서서히 높아졌고, 1980년대에는 본격적인 성지 개발이 이루어졌다. 피정의 집(1991년), 영성관(2000년) 순례자의 집(2004년)이 축복됐다. 한티는 천주교 성지 가운데서도 특별난 곳이다. 한티는 신앙선조들이 아름답게 살다가 거룩하게 순교했고 영원히 묻혀있는 완벽한 성지이자 천주교인들의 마음의 안식처이다.

최미화 편집위원 magohalmi@msnet.co.kr

사진 정우용기자 v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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