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풍경이 변하고 있다. 전통 가족 사회와 달리 요즘은 아들 많은 집의 명절분위기는 썰렁하고, 딸 많은 집은 왁자지껄하다. 맞벌이 부부들이 자녀 양육문제 등으로 친정(처가) 가까이 살면서 이런 분위기는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딸 많은 집과 아들 많은 집의 명절 풍경을 콩트 형식으로 엮었다. 인터넷에 오른 주부들의 하소연과 명절 증후군을 호소하는 주부들 이야기를 취재해, 상징과 과장을 섞어 엮었다. -편집자 주-
◇ 딸 많은 집의 화기애애한 풍경
딸 넷에 아들 하나를 둔 김순분 씨 댁은 명절날 오후면 북적대기 시작한다. 늙은 아버지와 사십 줄에 접어든 외동아들이 조용히 제사를 올리던 오전의 쓸쓸한 풍경과 사뭇 다르다. 결혼해 출가한 딸들이 시댁에서 제사를 마치고 하나둘 도착하기 때문이다. 몇 해 전만 해도 명절 다음날이나 그 다음날이 돼야 친정 나들이하던 딸들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명절 당일 오후만 되면 모두 친정으로 모인다. 사위와 외손자들도 빠지지 않는다.
# 딸·며느리 모두 친정으로
하나뿐인 며느리는 친정에 온 시누이들 대접하느라 입이 툭 튀어나오곤 했다. 시누이들이 돌아가고 나면 건넌방에서 아들 내외가 토닥토닥 다투는 소리가 나기도 했다. 그러나 작년 설날부터 그런 풍경은 없어졌다. 딸들이 친정에 도착할 무렵이면, 며느리는 제 남편과 아이들 손을 잡고 자기 친정인 포항으로 간다.
며느리가 자기 입으로 명절날 친정에 가겠다고 한 것은 아니다. 사십 중반인 며느리는 요즘말로 하면 '구식'이어서 친정 일을 제 입에 올리기도 어려워했다. 명절날 식구들 대동하고 친정으로 온 딸들이 그렇게 하자고 했다.
"엄마, 올케도 오늘 친정에 가라고 하세요."
재작년 추석날 둘째 딸이 한 말이다. 때맞춰 올케가 밥상 챙겨주니 고맙기는 한데, 미안하다는 것이다. 올케가 시누이인 자신들 대접하느라 종일 부엌에 사는데 방에 다리펴고 앉아있기도 민망하단다.
며느리와 아들이 포항으로 떠나고 나면 집안은 활기로 넘친다. 오랜만에 온 외손자들의 재롱도 재롱이지만 사위들이 더 들떠 있다. 사위들은 본가보다 처가가 더 편하다고 한다. 전부 진심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전혀 마음에 없는 말 같지도 않다.
# 딸 많아 쓸쓸할 줄 알았는데….
김순분 씨는 사위들이 둘러앉아 화투 치고 윷놀이하는 모습만 보아도 좋다. 젊은 시절 딸만 주르르 낳아 말년에 쓸쓸할 줄 알았다. 이런 횡재 수를 만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엄마, 요새 아들 많은 부모는 길에서 죽고, 딸 많은 부모는 비행기에서 죽는대."
셋째 딸의 농담이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딸 많은 집은 해외 여행을 자주 보내주어 비행기 사고로 죽고, 아들 많은 집은 서로 안 모시려고 떠미는 바람에 부모들이 이 집 저 집 오가다가 길바닥에서 교통사고로 죽는다는 우스개다. 하기는 앞집 뒷집 옆집 둘러보아도 아들 많은 집은 적막하고 쓸쓸한 것 같다. 웃음소리 나는 집은 딸자식 많은 집이다. 아들 자식은 키울 때도 데면데면한 것이, 결혼한 후에는 저희들 마누라 눈치보느라 절절 맨다. 아들 셋을 낳아 젊은 시절 가슴 쭉 펴고 살던 고향친구 말자는 남편 잃은 후로 일년 내내 혼자 밥 해먹고 설거지한다고 했다. 자식들은 명절 때 코빼기만 보이고 금세 떠나버려 집은 적막하기 짝이 없단다.
저녁을 먹고 나면 술 좋아하는 둘째 사위가 보챈다. 딸들이 술상을 볼 때도 있지만 아예 근처 고깃집으로 나가기도 한다. 한잔하고 나면 흥 많은 첫째 사위가 앞장서 노래방으로 이끈다. 요즘 세상에는 딸이 가장 알찬 보험 같다는 생각도 든다.
◇ 추석을 앞둔 며느리들의 생각
# 막내 며느리의 변="형님은 사사건건 트집"
남편은 4형제의 막내다. 그래서 내 위로는 3명의 호랑이 같은 동서가 있다.
지난 설날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큰형님은 40대 중반으로 전업주부이며 시부모님을 모신다. 아침일찍 제사 지내러 가서 세배하고 부엌에 들어서자마자 큰 형님 얼굴에 찬바람이 돈다. 큰 형님은 유독 내게 잔소리를 많이 했다.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 어제는 왜 와서 제사 준비를 거들지 않았느냐? 설 전날에는 근무가 없지 않으냐? 결혼생활은 결혼생활, 직장은 직장이다. 이것 좀 해라. 저것 좀 해라. 손이 왜 그렇게 굼뜨냐?
참았다. 큰형님은 나보다 열 두 살이나 많다. 한 두 번 겪는 일도 아니고, 거꾸로 매달아도 '시댁 시계'는 돌아가는 법이다.
제사 끝내고 점심 먹고 설거지까지 함께 했다. 좀 젊은 관계로 내가 좀 더 부지런히 했다. 일 마치고 손 닦으며, "어머님 저희는 친정에 좀 가봐도 돼요?" 라고 물었다. 우리 어머님, 나를 어여삐 여기신다. 당연히 "그래, 그래 가 봐야지. 어서어서 가봐라. 그런데 친정에 빈손으로 가느냐? 친정 어머니 뭐 좋아하시냐?"
"지난 번에 어머님이 주신 김치를 좀 갖다 드렸더니 너무 맛있다고…." 내 말에 우리 시어머님 기분이 무척 좋아지셨다. 그리고 '큰애야, 김치 담을 때 몇 포기씩 더 담아야겠다.' 하시며 챙겨주셨다. 김치말고 다른 음식도 챙겨주셨다.
시댁을 나와 자동차 타고 친정으로 가는 데 전화가 걸려왔다. 큰 형님이었다.
'손윗사람들 아무도 안 갔는데 어떻게 먼저 나서냐? 내가 업어 키운 도련님이 너처럼 경우 없는 애랑 사는 걸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진다.'
평소에 쌓인 것 많은데다 옆에 어른들도 안 계시겠다, 나도 전화에다 대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내 할 도리 다 하고 친정 가는데 뭐가 잘못됐나요? 설거지를 안 했나, 어른들 수발을 안 들었나? 형님들도 친정 가고 싶으면 빨리 가세요. 왜 나한테 신경질이세요?" 형님은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
# 큰 며느리의 한탄="막내 동서, 너무 철 없다."
제사나 차례 준비는 정성이다. 돈 몇 푼 달랑 송금하면 며느리 도리 다 한 것인가? 갈빗짝 바리바리 사들고 와서 아양 떨면 시부모님이 진심으로 기뻐하시겠나? 나이 어린 며느리 앞에서 불편한 내색을 하실 수 없으니 그저 '오냐 오냐' 하는 것 뿐이다. 어른들이 그렇게 '오냐 오냐' 하신다고 제 할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막내 동서가 너무 철 없어 보인다.
김치만 해도 그렇다. 우리 시어머님 김치 담그는 솜씨는 일품이다. 우리집 김치는 나름대로 전통이 있다. 와서 배우라고 몇번이나 말했나? 김치 담글때 부르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꼬빼기도 안보이다가, 올 때마다 바리바리 싸달라고 하면 어느 동서가 '오냐, 너 이쁘다. 그래라' 하겠나?
친정 가는 일도 그렇다. 시어머님 앞에 눈 딱 뜨고 '저희들 이제 친정 가면 안돼요?'라고 묻는데, 어느 시어머님이 '가지 마, 안돼' 라고 하시겠나. 일년에 명절이 몇번이나 되나? 제사 때는 회사일 핑계로 참석 못하고, 명절 때는 친정가야 한다고 앉자마자 나서니 부모·자식 간에 정 생기고, 형제간에 우애 생길 틈이 없다. 내가 보니 우리 시어머니, 아들만 많지 요즘 좋은 거 하나 없는 것 같더라. 딸 많은 집, 부러워 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나이 어린 막내동서를 미워할 일이 뭐가 있겠나. 너무 철없이 구니 어른 된 입장에서 잔소리 할 수밖에 없지 않나. 별 것도 아닌 문제로 늘 잔소리해야 하는 나도 이제 지겹다. (2006년 9월 28일자 라이프매일)
조두진 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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