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영화는 좋은 배우를 발굴한다. 그 전까지 그 배우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새삼 주목하게 하며 비로소 제대로 된 평가가 내려진다.
영화 '타짜'(감독 최동훈, 제작 싸이더스FNH·영화사 참)의 김윤석(39)이 그렇다. 아귀 역을 맡은 그는 숨가쁘게 달려온 영화의 마지막 20여분 등장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하얀 셔츠를 입고 선글라스를 낀 채 전라도 사투리를 쓰며(그처럼 완벽하게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배우가 흔치않은데, 그는 부산 출신이다!) 고니와 진검승부를 펼치는 장면을 통해 영화는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현재 MBC 아침 드라마 '있을 때 잘해'에 출연 중인 그는 '범죄의 재구성' '천하장사 마돈나' 등에도 등장했으나 '타짜'를 통해 관객의 시선을 확 붙들어 놓는다. 아귀는 고니가 뛰어넘고자 하는 화투판의 지존이며 인간적인 면모를 놓치지 않는 고니와 확연히 구별되는 안티히어로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제 얼굴, 제 이력을 보고 아귀같은 캐릭터에 캐스팅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날 믿어주는 감독에게 배우는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게 되죠."
'범죄의 재구성'에서 천호진과 함께 다니는 형사 역을 맡았던 그를 캐스팅하며 최동훈 감독은 촬영현장 등지에서 기자들을 만나 "김윤석이란 배우를 눈여겨 봐줄 것"을 주문했다.
선상에서 마지막 도박신외에 기차역에서 평경장을 만나는 신, 장례식 신 등 몇 차례 밖에 등장하지 않아 촬영 횟수를 물었더니 잠시 생각해본 뒤 "6일밖에 안찍었네요. 전 '꽁으로' 먹었습니다. 하하"라며 웃는다.
그러나 그 만큼 막중한 책임감도 느꼈다고 했다. 그는 축구선수로 비유했다.
"1대1로 비기고 있는 상황에서 후반 5분을 남기고 교체선수로 들어간 것과도 같은 부담감이었습니다. 잘해도 본전이고, 못하면 역적이 되는 거죠. 다행히 주변분들의 평이 좋으니 나름대로 선방한 것 같네요."
단 6일 촬영하고도 존재감을 확실히 심어줄 만한 연기를 보였을 정도로 그의 연기 내공은 만만찮다. 김민기씨가 이끄는 극단 학전에서 '지하철 1호선' '의형제' 등에 출연했으며 연출도 담당했다.
"연기가 하고 싶어 아쉬워하시는 김 선생님의 뜻을 거스르며 극단을 나왔고, 이후 연기자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오고 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아귀는 한 마디로 '변태'다. 성적 변태가 아닌 인간의 말초적인 본성을 뒤틀리게 드러내는 변태.
"아귀는 속임수가 아닌 진짜 승부로도 더 이상 올라갈 자리가 없다고 생각해 변태적으로 승부를 겁니다. 신체의 일부를 걸고 말이죠. 돈을 버는 것을 넘어서 다른 사람의 팔이나 귀를 자르며 희열을 느끼는 악귀같은 존재입니다."
그는 아귀가 철저히 고니의 상대 개념으로 비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귀는 영화가 2시간 여 동안 진행되며 도박판에서 벌어지는 일반 사람들의 이야기로 끌어온 것을 한순간에 뒤집어 엎습니다. 평경장은 도박을 통해 도를 닦은 인물이라면, 아귀는 도박의 화려함을 아작내버리죠. 얼마나 도박이 살벌하고 극한 감정을 건드리는지 관객에게 인식시키는 인물입니다. 그래야 고니의 선함이 상대적으로 더 드러날 수 있기도 하니까요."
목숨을 건 도박에서 고니의 행동에 아귀는 혼란에 빠진다. 아귀는 철저히 자신만을 위해 사는 인물. 스승의 복수를 위해 자기 목숨을 거는 고니를 보면서 결코 이해하지 못하지만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부하에게 약속대로 자신의 팔을 '잘라'라고 소리지른다. 이 장면에서 김윤석과 조승우의 연기는 화면이 터져나갈 듯 팽팽하다.
송강호, 황정민, 유오성 등 연극판에서 함께 고락을 같이 했던 배우들이 영화계의 중심배우로 자리잡고 있는 것에 비하면 김윤석의 행보는 좀 뒤쳐진 감이 있다.
"서울로 올라와 대학로에서 연극하면서 29~30살 때 지쳤어요. 만나는 사람만 계속해서 만나고, 연극한답시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치열하게 살았던 내 자신의 모습이 벅찼나봐요. 5년 정도 라이브 카페도 하고 딴 짓하면서 외도를 했습니다. 그래도 연기할 때가 제일 나았다고 생각해 다시 돌아와보니 영화와 연극의 교류가 활발해져 있더군요. 동료들이 영화계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됐구요."
그들과 비교하지 않고 차근차근 작품을 해왔다. 그래서 실수도 덜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그의 존재를 알아봐주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날 알아주니 배우로서 좋은 건 무엇보다 멍석이 넓어지고, 할 수 있는 게 늘어났다는 점입니다. 내 성에 차고 싶은 연기를 하겠다는 욕구가 끓어올랐는데 조금씩 그런 기회가 생기고 있습니다.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죽고 싶다'고 말하는 건 현실적으로 계속 일하고 싶다는 걸 뜻하고, 그러려면 대중과 감독들에게 기억되는 배우가 돼야 하는 거죠."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생긴다면 하나씩 둘씩 내놓을 것이며, 책임감도 더 생길 것 같다고 한다. 딸만 둘인 그는 "가족이 주는 묘한 책임감이 되레 편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누군가를 위해서라도 살아야 한다는 게 책임이면서 기쁨이 된다"고도 말했다.
그는 언젠가 '현실에 딱 밀착되는 멜로'를 하고 싶다는 꿈을 살짝 내비쳤다.
"아리고, 쓰리고, 모든 것을 다 이해하면서도 이해하는 것 자체가 슬픈 사랑. 20대 못지 않은 열정이 있지만 사랑이 결코 현실을 이길 수가 없다는 걸 아는 사랑. 이런 현실에 뿌리를 둔 멜로 연기에 한 번 도전해보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김윤석이라는 이름 석 자를 기억해두자.
(연합뉴스)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