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에 온 '파이란'…정신병 남편 돌보는 김선화 씨

2평 남짓한 단칸방. 방문 틈으로 지나가는 기차소리가 들려온다. 저 기차를 타고 고향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고향인 중국 지린성 서란까지는 너무 멀고 기차로 갈 수도 없다. 10월 1일은 중국공산당 창립기념일. 올해는 일주일간 쉰다. 중추절도 끼어 있는 덕에 다들 한국 사람들처럼 고향을 찾을 것이다. 혼자 맞을 추석, 고향이 더욱 그리워진다.

김선화(가명·44·서구 원대동) 씨는 조선족이다. 빈농에서 자란데다 밑으로 동생만 넷. 장녀였던 탓에 동생들 뒷바라지를 해야 했고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스무 살 무렵, 이웃 한족 남자와 결혼을 했다. 행복감을 맛본 것도 잠시 뿐. 남편은 도박과 술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다. 만류하는 김 씨에겐 주먹을 휘둘렀다. 생활비를 가져다 준 적도 없었다.

결국 선택한 길은 이혼. 딸과 함께 어머니 품으로 돌아왔다. 마음의 상처는 컸다. 다시는 결혼을 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결혼 생활은 너무 힘들었어요. 어머니 옆에서 겨우 안정을 찾았죠. 세월이 흐르고 저도 나이가 드니 어머니가 혼자 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 자란 제 딸(23)도 재혼, 제 삶을 찾으라고 했고요. 한국 남자는 아내를 아껴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국 남자와 결혼하라더군요."

여러 차례 혼담이 오간 끝에 지난 2003년 7월 한국인 남편(57)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하지만 그 해 말 한국을 찾았을 때 김 씨의 꿈은 절망으로 바뀌었다. 살림을 차리게 된 방은 2평 남짓한 월세 10만 원짜리 단칸방. 세간이라곤 옷장 하나, 낡은 냉장고가 전부였다. 남편은 국민기초생활수급권자였다.

게다가 그는 간질을 앓고 있는 장애인. "평소엔 '당신 밖에 믿을 사람이 없다'며 다정하던 사람이 한번 발작을 일으키면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절 괴롭히더군요. 집에서 쫓겨나 밖에서 밤을 지새운 적도 여러 번이죠. 소식을 전해들은 어머니는 화병을 얻어 쓰러지시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8개월 남짓 살았을까요. 결국 남편은 정신병원으로 가게 됐어요."

식당 주방에서 일해 받는 돈은 한달에 많아야 30만 원. 남편 병원비 10여만 원과 매달 남편을 찾아가는 차비를 제외하면 입에 풀칠하기도 쉽잖다. 그래도 김 씨는 남편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달에 두 번, 문경의 한 정신병원에 있는 남편을 찾았다. 먹고 싶은 것이 없는지 물은 뒤 음식까지 챙겨든 채. 남편을 챙겨줘 고맙다며 병원 의료진을 위해 음료수도 꼬박꼬박 사다 날랐다.

부산으로 병원을 옮긴 후에도 김 씨의 발길은 이어졌다. 남편을 남겨두고 떠나버릴 것이라 여겼지만 변함없는 김 씨의 순박함과 정성에 탄복, 주위 사람들도 한국 생활에 서툰 김 씨와 음식을 나눠먹는 등 챙겨주게 됐다. 남에게 도움받길 부담스러워하던 김 씨도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었다.

김 씨는 요즘 일주일에 두 번 인근 복지관을 찾아 한글을 배운다. 말은 할 수 있지만 학교를 다니지 못한 탓에 글을 몰라서다. 아직 단어 몇 개를 겨우 쓰는 정도. 그 중 자신 있게 쓸 수 있는 말은 '사랑해요'. 남편을 위해 제일 처음 익힌 단어다. 김 씨는 자신이 적은 글을 보며 활짝 웃던 남편의 얼굴을 잊지 못한다.

김 씨의 소원은 남편과 함께 생을 보내는 것. 함께 할 날을 꿈꾸며 아픈 허리를 부여잡은 채 식당일을 견딘다.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남편을 외면할 수 없어요. 발작을 하지 않을 땐 누구보다 절 아껴준 사람입니다. 더구나 절 한국으로 올 수 있게 해준 사람이잖아요. 제가 아니면 돌봐줄 사람도 없거든요. 전 이미 너무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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