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영진의 대구이야기] (41)작가 최정희의 대구 피란시절

여류작가 최정희(崔貞熙)는 대구에서 피란살이를 했다. 1.4후퇴 때 대구로 피란을 온 그녀는 2년 안팎에 이사를 네 번이나 했을 정도로 힘겨운 셋방살이를 했다. 이사라 할 것도 없이, 이불 봇짐과 보퉁이 몇 개를 들고 어린 딸들과 함께 단칸 셋집으로 옮겨 다녔을 뿐이다. 그러다가 이따금 마음 따뜻한 이웃을 만나는가 하면, 기분 상케 하는 심성 나쁜 사람들과 마주치기도 했다.

그녀는 수필에서 그 무렵 대구에는 '4대 명물'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 첫 '명물'로, 대구에 와서 제일 처음 느낀 것이 사람 똥이 많은 것이었다고 한다. "어디로 가든지 똥이고, 길에도 똥이고, 수채에도 똥"이더란 것이다. 이승만대통령이 외국인보기 부끄럽다며 오물청소에 경주하라는 특별담화를 내어 놓았을 만큼, 길거리에 마구 버려진 인분으로 인해 최정희가 받은 충격은 컸던 모양이다. 왜 이렇게 더럽냐고 대구사람들에게 물었더니, 피란민들 때문이며, 피란민들이 밀려오기 전에는 이렇지 않았다고 항변하더란다. 이 때문에 그녀는 "처음 와선 된장찌개를 먹어낼 수 없으리만치 똥에 질렸다"고 회상했다.

두 번째 '명물'은 먼지였다고 한다. 질주하는 군용차들로 "흙바람이 심한 날처럼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먼지가 일었다"고 했다. 사실 이 무렵 중앙로 등, 옛 4대문 안의 도심지 거리만 아스팔트였을 뿐 나머지 거리는 거의 비포장도로였다. 이런 도로를 트럭과 스리쿼터, 지프차가 쉴 새 없이 달리는 후방 제일의 병참도시 대구였던 만큼, "숨 막히고 병이 생길 정도"로 먼지투성이였음은 너무나 당연했다.

세 번째 '명물'을 그녀는 '자(子)야'로 들었다. "이 집에도 '자야', 저 집에도 '자야', 옆집에도 '자야', 뒷집에도 '자야'였다"는 것이다. 열 살 내외의 계집애들 이름이 거의 '숙자'나 '영자', 혹은 '순자' 등 순일본식 이름인데다, 영남사람들은 애들의 이름을 부를 때 끝 자만 부르길 좋아해, 아무 집에서나 '자야'하고 부르니 '자야'천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이다.

네 번째 '명물'로, 대구엔 집집마다 감나무가 많은 것이라 했다. 한 집에 두서너 그루가 있기 보통인 감나무로 여름에는 싱싱 푸른 잎으로 시원해서 좋고, 가을하늘 아랜 불그레한 열매를 달고 서 있어 오붓한 정감을 느끼게 해서 좋았단다. 그러므로 최정희는 "좋은 것 하나가 덜 좋은 것 여럿의 매스꺼움을 덜 수 있다는 사실을 감나무를 통해 배웠다"고 했다.

대구는 그러나 최정희로썬 애틋한 추억이 서린 고장이었다. 스무 한살 때인 1930년 영화감독이던 경북 선산출신 첫 남편 김유영(金幽影)과 동경에서 결혼한 그녀는 신혼살림의 한 때를 대구시집에서 보낸 적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그녀는 '제 2차 카프사건'으로 남편과 함께 옥고를 치른 직후, 이혼에 이어, 사별의 아픔까지 겪으면서 대구와는 인연을 끝내는 듯 했다. 그러나 그녀의 큰 여동생이 해방 전 대구사람 이갑기(李甲基 .월북 작가)와 결혼함으로써 다시금 간접의 연을 이어온 터였다.

훗날 대를 이어 작가가 되는 두 딸 김지원과 김채원을 대구수창국민학교에 입학시킨 최정희는 장덕조, 최인욱, 구상 등 종군작가단 소속 문인들의 우정에 힘입어 피란살이의 설움을 그런대로 잘 달래갔다. 휴전이 되지 않았다면 이들 정다운 글벗들과 오래토록 눌러 살았을 정도로 대구와는 끈끈한 정을 쌓아가고 있었다. 이 무렵 갓 출간된 백기만의 저서 '상화와 고월'이 호평 속에 읽히자, 두 시인의 호를 딴 '상고(尙古)예술학원'이 남산동에서 문을 열게 되었다. 교무처장인 소설가 최인욱의 권유로 조지훈, 박영준, 박기준, 구상 등 문인들과 함께 최정희도 이때 문학강좌를 맡았다. 잘 됐으면 '문예대학'으로 클 뻔 했으나, 휴전 후 최정희를 비롯한 피란문인들의 대부분이 환도하는 바람에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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